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엄마의 정서적 학대에 도망친 딸… 내면의 상처 응시하며 홀로 서요
입력 : 2024.10.31 03:30
엄마를 미워해도 괜찮아
가족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학대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런 행위를 가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학대'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해요. 보통 사람들도 엄마가 학대 가해자라고 하면 잘 믿어지지 않을 거예요.
이 책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정서적 학대를 다룬 에세이예요.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엄마를 향한 미움과 사랑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했던 딸이 직접 쓴 책이에요. 어린 시절 경험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치지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고통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저자는 담담하게 보여줘요.
저자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혼자 두 아이를 키운 엄마 밑에서 자랐어요. 엄마는 자신의 불행한 삶을 딸에게 토로하며,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지 딸이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며 한탄을 쏟아내고, 험한 말과 욕설을 퍼붓기도 했죠. 저자는 혹시라도 엄마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하며,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다고 해요.
저자는 내면의 상처를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치유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해요. 아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조차 큰 용기가 필요해요. 당장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왜곡하거나,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들조차 일반적이라고 믿는 식으로 순간순간을 모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과정을 매우 섬세하게 담고 있어요. 엄마와 함께 있으면 자꾸 죽고 싶어져서, 자꾸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살기 위해 결혼을 했고 그렇게 도망쳤다고 저자는 고백해요. 하지만 도망이 문제를 해결해 주진 못했다고 해요. 문제를 회피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거예요.
저자는 엄마에게서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를 매일 밤 울며 적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자신이 이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천륜 끊은 자식'이 아니라 그저 '정서적 학대를 받은 아이'일 뿐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해요. 자신의 세상 안에 갇힌 엄마를 자신의 힘으론 조금도 바꿀 수 없으니, 그런 엄마를 그 자신으로 살게 두고 자신은 살 길을 선택한 것이라는 거예요. 저자는 엄마와의 소통은 물론 관계까지 완전히 단절하기로 마음을 먹어요. 그러곤 자신의 판단이 결국 옳았음을 확신하며 이렇게 말해요. "누구도 정서적 학대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죄책감을 강요할 수 없다. 아픈 기억을 품은 채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관계가 곧 존재일 수는 없어요. 관계는 나를 위한 것이어야지, 내가 관계를 위해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한 인간이 독립적인 주체로서 홀로 서가는 과정을 극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