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위 인문학] 저물어가는 산업도시 출신 주인공, 꿈 좇아 고정관념에 맞서죠
입력 : 2024.10.28 03:30
도시의 역사를 담은 뮤지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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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킹키 부츠’에서 찰리의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 ‘돈’이 드랙퀸 부츠를 신고 환호하는 장면이에요. 돈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찰리와 롤라가 드랙퀸 부츠를 만드는 것을 못마땅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열정에 공감하게 됩니다. /CJ ENM
신발 공장 되살리려 남성용 부츠 제작
영국이 배경인 '킹키부츠'는 주인공 찰리가 폐업 위기의 신발 공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예요. 찰리는 대학을 막 졸업한 후 런던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눈앞에 두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음을 맞게 되어 아버지가 일군 신발 공장을 물려받게 됩니다.
공장엔 그동안 찰리가 몰랐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발을 못 팔아서 파산 직전이었던 거예요. 창고엔 유행에 뒤처져 팔리지 않는 남성용 수제화들이 가득 쌓여 있었어요. 아버지는 품질 좋은 신발을 만들었지만, 가격이 비싼 데다가 디자인도 특별하지 않아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었던 거죠. 아버지는 공장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싶지 않아 경영난을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찰리는 공장을 되살리기 위해 고심합니다.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직원들과 부딪히며 갈등하죠. 그때 찰리는 조력자를 만납니다. 바로 '드랙퀸' 스타 롤라입니다. 화려하게 여장을 하고 공연을 하는 남성을 드랙퀸이라고 해요. 최근엔 '드랙 아티스트'라고도 한답니다. 롤라와 만난 찰리는 이 '틈새 시장'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여성용 부츠를 남성도 편하게 신을 수 있게 디자인하기로 한 거예요. 둘은 남자가 신는 80cm 길이 레드 부츠를 만들어서 밀라노 패션쇼에서 공개하겠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하지만 이들 앞엔 난관이 펼쳐지죠.
뮤지컬 '킹키부츠'는 다른 신발 공장들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을 때 남성용 15cm 하이힐을 만들어 살아남은 영국 W J 브룩스 공장의 사장 '스티브 팻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어요. 2005년엔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아버지의 공장을 지키려는 아들의 노력, 노동의 가치와 일자리의 소중함, 그리고 소수자를 포용하는 따뜻한 인간미를 담고 있는 이야기예요. 2012년에 처음 공연된 뮤지컬은 이듬해 뮤지컬 분야 최고상인 '토니상'에서 6개 부문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는데요. 마돈나와 함께 1980년대 팝스타로 사랑받았던 신디 로퍼가 작사와 작곡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특히 공연이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함께 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 'Raise you up'은 정말 신난답니다.
가죽 제조업에서 유통·금융업으로
뮤지컬에 나오는 신발 공장이 있는 곳은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영국의 노샘프턴이라는 곳이에요. 인근에 '네네' 강이 흐르는 이 비옥한 지역은 로마 시대를 거치며 점차 번성했어요.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이후엔 신발과 가죽 공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크게 성장합니다. 19세기 초반 유럽 국가들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전쟁을 벌이는데요. 영국군의 군화도 노샘프턴 지역 공장에서 만들어졌답니다.
그러나 이곳은 20세기 후반부터 영국이 경기 침체를 겪고, 외국산 신발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쇠퇴하게 돼요. 이후 제조업 대신 유통과 금융업으로 도시의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신발 공장들도 차츰 문을 닫았지요.
탄광 폐쇄 맞선 대규모 파업이 배경이죠
이번엔 영국 북동부 탄광촌 더럼으로 가볼까요. 이곳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주인공인 11세 소년 빌리가 자란 곳입니다. 빌리 가족은 행복하지 않아요. 그의 형과 아버지는 인근 탄광의 광부인데, 대규모 광부 파업이 일어나면서 빌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죠. 어린 빌리에게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의 빈자리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리는 우연히 참여한 발레 수업에서 숨겨진 재능과 열정을 발견해요. 평생을 광부로 살아온 보수적인 아버지는 발레리노가 되겠다는 빌리의 꿈을 반대하지만, 곧 빌리의 진심을 깨닫게 되죠.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로열발레학교 면접까지 보게 도우며 빌리를 응원해요.
2005년 영국에서 처음 공연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동명의 영화를 무대화한 작품이랍니다. 영국 로열발레단 남성 무용수인 필립 모슬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죠. '빌리 엘리어트' 공연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작품 배경인 더럼 지역은 실제로 1980년대에 광부들의 대규모 파업 시위가 일어난 곳이에요.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적자에 허덕이던 석탄 산업 구조 조정을 강행합니다. 과거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석탄이 점차 석유로 대체되면서, 경제성이 낮은 탄광들을 폐쇄하기로 한 거죠. 탄광노조는 파업으로 맞섰지만 단호한 리더십으로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는 탄광 노조를 강경하게 진압합니다.
더럼 지역은 한때 300곳 넘는 탄광에서 광부 약 15만명이 일했던 곳이에요. 오늘날에도 석탄 산업의 유산을 보존하고 있답니다. 이곳의 '비미시 박물관'에선 지금은 사라진 탄광 마을을 체험할 수 있지요.
다시 무대로 돌아갑니다. 작은 탄광촌을 떠난 빌리는 마침내 로열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로 성장한답니다. 그리고 객석에 앉은 아버지 앞에서 멋지게 날아올라요. 빌리는 말합니다. "춤을 출 때면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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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11세 소년 빌리는 마을 발레 수업에서 춤을 추며 발레리노가 되는 꿈을 꿉니다.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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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이에요. 영국 더럼 지역 광부와 주민들이 석탄 산업 구조 조정을 벌이는 정부에 맞서 파업을 벌입니다. 현수막에는 ‘우리 지역을 살려내라(SAVE OUR COMMUNITY)’라고 쓰여 있어요. /신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