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같은 이슬람교 믿지만, 언어·문화 달라 파키스탄서 독립해

입력 : 2024.08.21 03:30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지난 5일 반정부 시위대가 방글라데시 총리 관저 앞마당과 지붕 등에 모여있는 모습. /EPA 연합뉴스
지난 5일 반정부 시위대가 방글라데시 총리 관저 앞마당과 지붕 등에 모여있는 모습. /EPA 연합뉴스
최근 방글라데시 정치 상황이 뒤숭숭합니다. 반정부 시위로 셰이크 하시나(77) 방글라데시 총리가 사퇴한 후 새로운 과도정부가 들어섰어요.

이번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공무원 채용 때 독립 전쟁 유공자 후손을 우대하려 하자 만성적 취업난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반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정부의 강경 진압에 300여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기소됐지만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총리가 인도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1971년 독립 전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에요. 그래서 목숨 걸고 싸운 독립 전쟁 유공자들을 특별히 예우해 왔다고 해요. 공직 채용 시 인원의 30%를 독립 전쟁 유공자 자녀 등에게 미리 할당하는 제도도 이러한 맥락에서 만든 거죠. 오늘은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독립 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동·서 파키스탄의 갈등

방글라데시는 원래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할 때 파키스탄의 일부인 '동파키스탄'이었어요. 지금의 파키스탄은 당시 서파키스탄이라 했어요. 두 지역은 한 나라였지만, 인도를 사이에 두고 2000km가량 떨어져 있었어요. 또 두 지역은 많은 이가 이슬람교를 믿는 건 같았지만 인종·언어·문화 등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이 정부와 군대 요직 등을 독점해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어요.

그러다 1950년대 초반 벵골어 운동으로 동파키스탄의 민족주의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동·서 파키스탄의 언어 갈등은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부터 계속 있었는데요. 1940년대 후반 의회에서 의원들이 서파키스탄 언어인 우르두어 등으로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어요. 그러자 동파키스탄 측 의원들은 동파키스탄인이 많이 사용하는 벵골어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 지도자들은 동파키스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이에 동파키스탄의 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이 분노합니다. 1952년 동파키스탄의 대학생들과 정치 운동가 등이 벵골어 사용 운동 시위를 벌였고, 많은 학생이 경찰의 진압에 다치거나 숨졌어요. 그러자 시위는 더욱 격해졌고, 결국 정부는 1956년 벵골어도 공식 언어로 인정합니다. 벵골어 사용 운동은 동파키스탄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했고, 이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등에 영향을 주게 돼요.

이렇게 동파키스탄은 민족의 언어 정체성은 지켜냈지만 계속해서 정부의 차별을 받습니다. 1960년까지 공무원 중 벵골계, 즉 동파키스탄인은 약 3분의 1밖에 안 됐다고 해요. 군사 시설과 경제 지원도 서파키스탄에 집중돼 있었죠.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을 마치 식민지처럼 이용했어요.

1971년 독립 전쟁

그러던 중 1970년 12월 동파키스탄 독립을 주장해 온 아와미 연맹이 선거에서 의석을 절반 이상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정부는 국회 개회를 무기한 연기했어요. 이에 아와미 연맹의 당수였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1971년 3월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군을 결성했습니다.

서파키스탄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어요. 이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300만명 이상 학살당하고, 피란민이 30만명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하지만 전쟁 양상은 인도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하면서 점차 변해갔고, 결국 12월 16일 서파키스탄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할 수 있게 됐답니다. 아와미 연맹의 당수였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1972년 1월 방글라데시 초대 총리가 됐는데요. 그의 딸이 얼마 전 반정부 시위로 사퇴한 셰이크 하시나입니다.

방글라데시는 독립 전쟁 유공자들을 '자유의 투사'라고 부르며 예우했어요. 자유의 투사들은 매달 받는 사례금 외에도 새해 수당, 승전 기념일 수당 등을 받고 일부 세금 면제 혜택도 받습니다.

최근 시위의 발단이 된 공직 할당제는 1972년부터 있던 제도예요. 처음에는 독립 전쟁 유공자가 대상이었지만 이후 유공자의 자녀와 후손으로 대상이 확대됐다고 해요. 하지만 공무원 일자리의 절반 이상이 유공자 자녀 등에게 할당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2018년 해당 제도가 폐지됐는데요. 폐지된 이 제도를 재도입할 조짐이 보이자 대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죠.

방글라데시에서 공무원은 인기 직업 중 하나예요. 안정적이고 보수가 높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3000여 공직을 두고 40만명이 경쟁할 정도라고 해요.

현재 수립된 과도정부는 빈민들을 위한 소액 대출 제도를 개발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겸 사회운동가 무함마드 유누스(84)가 이끌게 됐는데요. 야권과 시민 단체뿐 아니라 반정부 시위를 이끈 대학생 단체들이 국정 혼란을 수습할 지도자로 유누스를 강력히 지지해 왔다고 해요. 그런 만큼 이제 방글라데시의 혼란이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반정부 시위로 사퇴한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로이터 연합뉴스
반정부 시위로 사퇴한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로이터 연합뉴스
아와미 연맹의 당수였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그는 1972년 1월 방글라데시 초대 총리가 돼요. /다카대
아와미 연맹의 당수였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 그는 1972년 1월 방글라데시 초대 총리가 돼요. /다카대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