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탈모 고민하던 흑인 여성, 직접 제품 개발해 백만장자로
입력 : 2024.08.14 03:30
차별을 극복한 흑인 여성들
- ▲ ①흑인 여성 인권운동가로 노예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해리엇 터브먼의 젊은 시절 모습. ②자동차를 운전하는 마담 C J 워커 모습. ③마담 C J 워커가 판매한 헤어 제품. 마담 C J 워커는 흑인 여성들을 위한 헤어 제품 등을 팔아 백만장자가 됐어요. ④1958년 NASA 최초로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 메리 잭슨. /브리태니커·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및 문화 국립 박물관
해리스는 자메이카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도계 흑인 여성으로, 워싱턴 DC의 유서 깊은 흑인 대학인 하워드대를 졸업했어요. 해리스는 자신을 '흑인이자 아시아인'이라고 소개한다고 해요. 해리스는 이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과거 흑인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는데요. 오늘은 이를 극복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흑인 여성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많은 노예 구출한 해리엇 터브먼
먼저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로 노예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해리엇 터브먼(1820?~1913)입니다. 터브먼의 조부모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노예였어요. 터브먼 또한 노예 신분으로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평범한 삶과 자유를 갈망하던 어느 날, 터브먼의 건강이 나빠지자 주인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팔려고 했어요. 그러자 터브먼은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 비밀 조직 '지하철도'의 도움을 받아 북부 필라델피아로 탈출했어요. 당시 터브먼의 나이는 29세쯤이었다고 해요. 자유를 얻은 터브먼은 자신이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고자 수시로 남부로 갔고, 노예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활약이 계속되자 남부의 농장주들은 터브먼을 잡는 데 4만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어요. 하지만 터브먼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1850년부터 10여 년 동안 300명이 넘는 흑인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터브먼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군에 들어가 요리사, 간호사, 안내원 등으로 일했어요. 이때 남부에 스파이로 잠입하기도 했어요. 그는 남군의 병력과 군사기지 등 중요 정보를 빼돌렸고, 이 정보들은 북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보탬이 됐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터브먼은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과 함께 습격 작전을 지휘해 노예 700명 이상을 구출해 내기도 했어요.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먼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어요. 흑인들은 자신들의 탈출을 도와준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를 '검은 모세' '모세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터브먼은 미국 땅에 사는 흑인과 여성들, 특히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고달팠기 때문이죠. 터브먼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도 베푸는 삶을 살았어요. 자서전을 쓰고 일해서 번 돈을 모아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만들어 가난한 흑인들을 도와줬답니다. 그는 1913년 3월 폐렴으로 숨을 거뒀어요. 평등과 권리를 위해 싸우는 여러 세대 흑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
마담 C J 워커
다음으로 소개할 인물은 미국의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마담 C J 워커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세라 브리들러브(Sarah Breedlove)입니다. 1867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에서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어요. 일곱 살 때쯤 부모님을 모두 잃은 그는 먹고살기 위해 다른 사람 집에서 일하며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어요. 14세 이른 나이에 결혼했지만, 남편마저 일찍 죽자 저임금 세탁부로 힘들게 일했답니다.
당시 세라는 피부 질환과 탈모를 겪었는데, 이건 그 시대 흑인 여성들에게 일상적인 일이었어요. 머리를 자주 감지 못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 두피 질환을 많이 앓았거든요. 여러 제품을 사용해봤지만 효과가 없자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 제품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엔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업가 애니 터보 멀론의 제품을 파는 위탁 판매원으로 활동했어요. 그러다 자신의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어요. 1906년 찰스 조셉 워커와 결혼하고 마담 C J 워커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는데, 광고 분야에서 일하던 남편의 도움과 격려를 받으며 사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개발한 '마담 워커의 원더풀 헤어 그로어'를 직접 홍보하고 사용법을 시연했어요. 판매량은 빠르게 증가했고 1910년 전후로 공장도 짓게 됐어요. 결국 사업을 해외로 확장하고 직원 4만여 명을 고용한 사업가로 성장했습니다. 직원 대부분은 흑인 여성과 남성들이었다고 해요.
그렇게 워커는 백만장자가 됐습니다. 이후에도 인종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도움이 필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는 등 기부도 꾸준히 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NASA에서 일한 흑인 여성들
마지막은 미국 초기 우주개발에 큰 공헌을 한 도러시 본, 메리 잭슨, 캐서린 존슨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로 만들어졌지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전신인 미국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의 랭글리 연구소에는 계산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연구소는 남자들이 군대에 입대하거나 징집되는 상황으로 인해 여자들을 모집해야 했고, 여자로 구성된 계산팀이 만들어졌어요. 계산팀에서 일부 중요한 자리는 백인 여성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졌지만, 점차 자격이 확대되면서 흑인 여성들도 지원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의 직장 생활은 매우 힘들었어요. 신입 남성 직원 임금의 절반도 받지 못했고, 식당에선 '유색인' 표시판이 있는 테이블에서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 흑인 여성은 이런 차별 속에서도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이의 인정을 받게 됐어요. 도러시 본은 연구소에 들어온 IBM 컴퓨터의 유용함을 간파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을 독학했어요. 이후 IBM 컴퓨터를 훌륭하게 다루는 프로그래머로 이름을 날리게 됐습니다.
메리 잭슨은 1958년 NASA 최초로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 인물이에요. 수학자와 항공우주 공학자로 일하며, NASA가 우주로 비행사를 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캐서린 존슨은 뛰어난 수학 능력으로 우주선 궤도 계산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