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어제 그게 항복 방송이었어!" 다음 날 해방 만끽했죠
입력 : 2024.08.08 03:30
1945년 8·15 해방
- ▲ ①1945년 8월 6일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버섯구름이 피어오른 모습. ②1945년 9월 2일 일본 측이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③1945년 8월 1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앞 삼거리에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위키피디아
패망을 앞둔 일본 제국주의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한국인들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혹독한 탄압을 받았어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따른 강제적인 징병과 징용이 이뤄졌고, 우리말 교육이 금지된 데다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습니다(창씨개명). 전쟁 상황이어서 생활도 무척 궁핍해졌죠.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졌어요. 여기에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이 카이로 선언을 통해 '승전한 뒤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승인하겠다'고 밝힌 사실도 많은 사람이 알아차렸다고 해요. 오랜 세월 숱한 지사들이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수행한 결과 '일본과 다른 나라'로 인정받고 곧 독립을 쟁취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던 겁니다.
1945년 7월 24일, 사실상 마지막 항일 의거라고 할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폭탄 의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월 26일에는 연합국이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이제 새벽이 멀지 않았습니다. 8월 6일 미군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이틀 뒤인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다음 날인 9일 미군이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습니다. 11일에는 소련군이 나진과 웅기 등 한반도 일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며칠 일찍 일제 통치에서 벗어난 셈이지만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 잘 몰랐습니다.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직감한 총독부는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 송진우와 접촉해 '통치권을 넘겨줄 테니 일본인이 안전하게 탈출하도록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송진우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총독부는 다시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있던 중도좌파 지도자 여운형과 교섭했죠.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 총독부 정무총감과 회담해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약속받고 이후 행정권 일부를 넘겨받았다고 합니다.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문 열려
드디어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연합국의 공동 선언(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라디오 녹음 방송을 했어요. 무조건 항복을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보면 이 방송 직후 많은 한국인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15일 당일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요. 아직 일왕의 방송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한편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에선 그 소식을 듣고 오히려 통탄했다고 합니다. 광복군을 훈련시켜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進攻·적을 치기 위해 앞으로 나감) 작전에 투입되는 것을 앞두고 있던 김구 주석은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에 우리가 참전해야 독립 과정에서 당당히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을 텐데,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해 허사가 됐다는 것이죠.
많은 한국인이 일왕 방송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다음 날인 16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서대문형무소 등에 수감된 한국인 독립투사들이 일제히 석방됐고 '어제 일왕이 항복 방송을 한 것'임을 비로소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우리가 보는 8·15 사진처럼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됐던 것이죠.
그런데 금지돼 있던 태극기가 갑자기 어디서 생겼을까요?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 문양을 참고하거나 기억을 더듬어 태극기를 새로 그리기도 하고, 급한 대로 일장기에 덧칠을 해서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방 도시에선 17일이 돼서야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은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전함 미주리호 위에서였습니다.
국경선처럼 바뀐 38선의 비극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남북 분단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맞게 됩니다. 한반도의 남북을 가른 38선은 애초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일본 재산 몰수를 위한 경계선이었습니다. 항복 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은 34만7000여 명이었고 이 중에서 38선 남쪽 지역에 23만여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8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해 각각 일본군을 무력화(無力化)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할 분담의 경계선이었던 38선은 점차 국경선처럼 변했습니다. 소련군은 1945년 8~9월 38선 남북의 통행과 통신·우편을 차단했습니다. 9월 12일 시작된 런던외상회의에서 소련은 패전국인 일본의 통치에 대한 참여와 북아프리카 트리폴리타니아(현 리비아 북서부)의 할양을 요구했습니다. 태평양과 지중해로 동시에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던 것이죠.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소련의 스탈린은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9월 20일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구축할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평양에서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와 산업 시설을 국유화하고 지방 기구를 조직한 사실상의 정부로, 현재 북한 정권의 전신(前身·바뀌기 전의 본체)이었습니다. 한반도의 남북 분단이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린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