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깐닥깐닥·싸브락싸브락·야몽야몽… 모두 '천천히'라는 뜻의 방언입니다
입력 : 2024.07.18 03:30
겨레의 작은 역사 방언
이길재 지음|출판사 마리북스|가격 1만8000원
이길재 지음|출판사 마리북스|가격 1만8000원
전라남도 담양에는 '대전면 싸목싸목 탐방길'이라는 이름의 산책길이 있어요. 여기서 '싸목싸목'은 '천천히'라는 뜻을 가진 전라도 방언이라고 해요. 원래 천천히 걷는 모양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점차 의미가 확대된 것으로 추정된대요. '싸목싸목'은 '가다'나 '오다' '걷다'와 같은 동사와 잘 어울려요. '우리 싸목싸목 가자'라고 한번 말해보세요. 입에 쉽게 붙기도 하고, 정겨운 느낌도 드는 것 같아요. 아주 가까운 사람과 함께 산책할 때 사용해보고 싶은 말이네요.
이 책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지역어를 담당하고 있는 언어학자 이길재 박사가 썼어요. '싸박싸박'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며 '싸목싸목'도 소개하고 있어요. 전라도에는 '싸목싸목' 외에도 '싸박싸박' '장감장감'이라는 방언이 있는데, 모두 '천천히'라는 뜻의 말이라고 해요. '싸박싸박'은 눈 쌓인 길을 사박사박 걷는 모양을, '장감장감'은 비 내리는 길을 까치발을 디디며 걷는 모양을 본뜬 말이라네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깐닥깐닥, 사심사심, 신지모르게, 싸득싸득, 싸브락싸브락, 쏠레쏠레, 야몽야몽'. 놀랍게도 이 단어들도 모두 '천천히'라는 뜻의 방언들이라고 해요. 의미는 같아도 말맛이 조금씩 다르니 그때그때 적당한 것을 골라서 사용했겠지요.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섬세하고 풍부한 언어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이 책은 우리 겨레의 방언 47개를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칩니다. 47개 방언을 중심으로 연관되는 다른 지역 방언, 조합 방식이나 뜻이 비슷한 방언까지 함께 소개해요. 그래서 책에 담긴 방언은 모두 1000개가 넘어요.
'방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표준어'의 반대되는 말 정도로 알고 있지요. 심지어 틀린 말이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방언은 표준어에 반대되는 말도, 밀려난 말도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해요. 표준어가 한 나라의 규범이 되는 말이라면, 방언은 각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난 소중한 겨레말로, 표준어의 바탕이 된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방언에는 그 지역민의 삶과 정서, 풍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방언은 역사를 아주 섬세하게 기록하고 간직한 도서관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방언은 표준어처럼 문자로 기록되기보다 주로 지역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속도가 빠르다고 합니다. 저자는 방언을 그저 하위의 언어 체계로만 보고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요. 방언 하나가 사라지는 건 단순히 단어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정서와 소중한 역사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