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 이야기] 부드러운 글꼴, 시원시원한 글꼴… 구구절절 설명없이 분위기 표현하죠

입력 : 2024.07.16 03:30

폰트(글꼴)

배달의민족 '을지로체'에 영감을 준 을지로 일대 간판들. /우아한형제들
배달의민족 '을지로체'에 영감을 준 을지로 일대 간판들. /우아한형제들
지난 5월 23일 석금호 산돌 이사회 의장이 별세했어요. 그는 1978년부터 6년간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당시 인쇄 기계와 한글 폰트를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는 한글 폰트를 직접 만들어내겠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1984년 국내 최초 폰트 기업 산돌을 창업했죠. 산돌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최초의 한글 기획 폰트인 '맑은 고딕'과 네이버에서 무료 배포해 국민 폰트가 된 '나눔 고딕' '나눔 명조'를 개발하며 명성을 얻었어요. 폰트는 디자인적 일관성을 갖춘 글자의 묶음을 뜻해요. 우리말로는 '글꼴'이라고 하죠. 폰트를 구분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가장 크게 세리프(serif) 폰트와 산세리프(sans serif) 폰트로 나눠요. 세리프는 글자 획 끝부분에 돌출된 돌기를 말해요. 우리에게 익숙한 바탕체·명조체가 세리프 폰트예요. 반면 산세리프 폰트는 '없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산(sans)'과 세리프가 결합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리프가 없는 폰트를 말하는 것이죠. 한글의 돋움체·고딕체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폰트는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과 비슷해요. 세리프의 유무와 생김새, 굵기에 따라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죠. 이를 잘 이용하면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특별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고 폰트만으로도 원하는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예컨대 세리프 폰트는 15세기 인쇄 혁명 이후 오랜 시간 발전해온 산물입니다. 그 덕에 전통과 유산을 대변하고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죠. 우아하고 부드러운 느낌과 격식을 차린 듯한 느낌을 풍깁니다. 패션 잡지 '보그'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부터 세계 최초로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든 기업이자 독일의 대표 고급차 브랜드 '메르세데스 벤츠' 등은 세리프 폰트로 로고를 만들어 브랜드를 홍보하는 데 성공했어요. 반면 산세리프 폰트의 매력은 간결한 느낌입니다. 사람으로 예를 들면 또렷하고 시원시원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적인 이미지도 강해요. 그래서 20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브랜드에서 산세리프 폰트를 굉장히 애용했어요. 대표적인 산세리프 폰트 중 하나인 헬베티카(Helvetica)는 BMW와 맥도널드, 3M 등 수많은 글로벌 브랜드 로고에 쓰였죠. 서구에선 '무슨 폰트를 써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헬베티카를 써라' '헬베티카를 보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농담까지 있답니다. 최근 몇 년간 세리프 폰트에서 산세리프 폰트로 바꾸는 로고 리뉴얼이 유행하면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브랜드 전용 폰트를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달의민족은 1970년대 을지로 일대 간판 글자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을지로체' 등 여러 폰트를 만들어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답니다. 2020년 조선일보도 창간 100주년을 맞아 1920년대 조선일보 지면 글꼴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 '조선100년체'를 무료 배포하기도 했어요.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