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日 해적 막기 위한 명나라의 무역 통제 정책… 배 타는 것까지 금지했대요

입력 : 2024.06.25 03:30

해금령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홍무제는 민간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과 거래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는 것까지 금지하는 해금령을 시행했어요. /위키피디아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홍무제는 민간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과 거래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는 것까지 금지하는 해금령을 시행했어요. /위키피디아
최근 알리익스프레스 등 중국 전자상거래(이커머스) 플랫폼들이 국내에 많이 알려졌는데요. 지난해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중국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 물건을 구매한 금액이 3조원을 넘었다고 해요. 중국 기업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상거래를 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과거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국가가 나서서 자유로운 상거래를 제한한 적이 있었다고 해요.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무너트리고 중국에 한족(漢族) 왕조를 회복한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는 "한 조각의 널빤지도 바다에 띄우지 말라"며 해금령(海禁令)을 내렸습니다. 해금령은 민간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과 거래하는 것뿐 아니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는 것까지 금지하는 강력한 사무역 통제 정책이었죠.

이렇게 바다로 나가는 것을 통제한 이유는 왜구로 인한 피해 때문이었어요. 왜구는 13~16세기에 한반도와 중국 해안에서 약탈을 하던 일본 해적들을 말해요. 이들은 농경지가 부족한 지역에서 빈곤한 생활을 했는데, 주변 다른 나라의 배와 창고를 털어 곡식을 약탈하거나 사람들을 납치해 보상금을 노리는 등 오랫동안 한반도와 중국의 골칫거리였어요. 왜구로 인한 피해가 심해지자 명의 홍무제는 해금령을 내리고, 당시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요시미쓰에게 왜구를 단속하면 조공 무역을 허락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조공 무역은 일본이 명에 복속한다는 증거로 조공 물품을 바치면 명이 일본에 답례품을 보내는 형식의 무역으로, 민간 상인들의 자유 무역이 아닌 국가 간 무역이랍니다.

일본 막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명나라에서 발급하는 도항 증명서인 '감합'을 갖고 있는 일본 선박만 무역을 할 수 있게 됩니다. 15세기 초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이런 조공 무역이 20회 가까이 진행됐어요. 명은 해금령으로 왜구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진귀한 중국 물건을 갖기 위해선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을 주변국에 전달한 것이에요.

명의 해금령은 중국 물품에 대한 해외 수요가 높아지면서 밀무역이 성행하자 이를 막기 위해 1567년에 완화됐어요. 그러다 17세기 청나라 때 다시 등장했습니다. 청이 해금령을 선포한 이유는 반청 세력 때문이었답니다. 1644년 명이 멸망한 뒤 만주족 왕조인 청이 중국을 차지하자 한족들이 명나라 부흥 운동을 전개했어요. 특히 정성공 일가는 대만에 반청 기지를 만들어 1680년 초까지 청에 대항하는 활동을 전개했다고 해요. 이처럼 청은 바다 너머에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해금령으로 엄격하게 해안을 통제해야 했었죠. 대만의 정씨 세력이 평정된 이후에는 해금령이 다소 완화돼 서양 상인들과의 교역이 허용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한족들이 서양 상인과 결탁해 반청 운동을 일으킬까 염려한 청은 오직 광동 지역에서만 서양 상인의 대외 교역을 허용했답니다.

황은하 상경중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