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정부 수립 이후 26차례 열려… 김대중 정부 때 8회로 최다
입력 : 2024.05.02 03:30
영수 회담
- ▲ 1975년 5월 2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회담을 했어요. /김영삼민주센터
여기서 '영수'의 영(領)은 '옷깃', 수(袖)는 '소매'라는 뜻이에요. 옛날 옷에서 옷깃과 소매가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라는 이유로 '영수'란 말에는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란 뜻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들어서 '여당 총재와 야당 총재의 회담'이란 의미로 '영수 회담'이라는 용어를 쓰게 됐던 것이죠.
과거에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회담'을 영수 회담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행정부와 입법부가 분리된 민주주의 체제에서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입법부의 핵심 축인 여당 대표를 빼놓고 야당 대표와 일대일로 만나는 자리를 영수 회담이라 불러선 안 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영수 회담'이라고 부를 만한 회담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정조와 심환지: 겉으론 대립, 사실 협력 관계
2009년 2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자료가 공개됐어요. 조선 왕조 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가 쓴 어찰(御札·임금이 쓴 편지) 290여 통이었습니다.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였죠. 당시 정조의 정치적 반대 세력은 당파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노론 중심의 '벽파'였고, 정조의 정치적 노선에 찬성하던 신하들은 '시파'라 불렸습니다. 벽파의 중심 인물이 지금의 야당 대표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가 바로 심환지였습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인 심환지에게 300통에 가까운 비밀 편지를 보낸 것도 놀라운 일인데, 내용은 더 뜻밖이었습니다. 1798년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한 뒤 심환지가 사직 상소를 보내자 '이제 곧 내가 (사직하지 말라는) 왕명을 내릴 텐데, 며칠 내로 다시 사직 상소를 올리라'는 편지를 은밀하게 보냅니다. 벼슬을 덥석 받기 어려운 심환지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밀당'을 펼치는 고도의 정치적 기술을 썼던 것이죠. 1797년 편지에선 '내일 그대가 지방관이 백성을 수탈하는 폐단을 제기하라'고 지시합니다. 실제로 심환지가 왕 앞에서 이 말을 하자 정조는 칭찬하며 표범 가죽을 선물로 내립니다. 미리 각본을 짜고 대사를 정해 놓은 정치적 연극이었던 셈입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신하와 은밀하게 소통했던 '비밀 편지 회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막후 정치, 공작 정치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반대파까지도 끌어안을 정도로 그릇이 큰 소통의 정치라고 평가할 수도 있죠. 심환지가 정조에게 보낸 비밀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그가 무슨 이유에선지 '편지를 읽고 없애 버리라'는 왕명을 어겼기 때문에 정조가 쓴 편지만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과 박헌영: 통합에서 뛰쳐나온 공산당
8·15 해방이 된 지 두 달 뒤인 1945년 10월 31일, 굵직한 회담 하나가 서울에서 열렸어요. 이승만(1875~1965)과 박헌영(1900~1956)이라는 두 정치인의 회담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며칠 전인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정국에서도 양쪽으로부터 모두 지도자로 추대받을 만큼 영향력이 큰 우익의 지도자였죠. 반면 좌익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박헌영은 '야당 대표'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두 사람은 당시 이승만의 사저였던 돈암장에서 4시간 정도 만났습니다. 당시 언론은 '역사적인 중대 회의'라고 대서특필했죠. 이승만은 좌우 50여 개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아 통합하기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으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특정 정파와 협력할 수 없다며 탈퇴하겠다고 나선 상황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박헌영과 만났습니다. 이승만은 '먼저 힘을 합치고 독립국가를 완성하자'고 제안했으나 박헌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회담은 그것으로 끝났고, 이승만은 공산당을 포용하려는 마지막 시도에 실패했습니다. 이는 이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를 배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박정희와 김영삼: 밀약 의혹으로 정치적 파장
1975년 5월 21일, 광복 이후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남았던 여야 영수 회담이 청와대에서 열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회담이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고 정국은 얼어붙었습니다. 반(反)유신 운동이 일어나고 긴급조치가 선포됐습니다. 1974년 8월엔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담이 열리자 김영삼 총재는 먼저 육영수 여사에 대한 조의를 표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창밖의 새를 가리키며 "내 신세가 꼭 저 새 같습니다"라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울적한 분위기 속에서 김 총재가 "유신을 철폐하고 대통령 직접 선거를 하자"고 하니 박 대통령은 "난 욕심 없다"며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으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김 총재는 이 회담 내용을 오래도록 밝히지 않았고 야당으로부터 '밀약을 한 게 아니냐'는 정치적 공격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투옥됐던 민주화 운동 정치인들이 일부 풀려나는 등 정치적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양자 회담은 지금까지 모두 26차례 열렸습니다. 가장 많이 열렸던 것은 김대중 정부(1998~2003) 때로 모두 8차례였고, 그중에서 7차례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만났습니다. 나중에 야당 측에선 '일곱 번 배신당했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남북 정상회담, 의약 분업과 민생 안정 조치 등에 대한 합의도 이뤄냈습니다.
그다음으로 영수 회담이 많았던 것은 박정희 정부(5회), 이명박 정부(3회), 노태우·김영삼·노무현 정부(각 2회), 최규하·전두환·문재인·윤석열 정부(각 1회) 순입니다. 군소 정당을 무시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정부와 야당이 서로 소통하고 존중하는 자리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이런 방식의 회담이 유효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 ▲ 1945년 10월 31일 이승만과 박헌영이 만나 4시간 정도 회담을 가진 장소이자 당시 이승만의 사저였던 서울 돈암장. /문화재청
- ▲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임금이 쓴 편지) 중 하나. 정조는 심환지에게 300통에 가까운 비밀 편지를 보냈어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