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고전 이야기] 실명이 전염되는 극한 상황 속 인간의 추악한 모습 드러났죠

입력 : 2024.04.30 03:30

눈먼 자들의 도시

1995년 출판된 '눈먼자들의 도시' 표지. /위키피디아
1995년 출판된 '눈먼자들의 도시' 표지. /위키피디아
눈이 먼 남자는 초조한 마음에,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내밀어, 그가 우유의 바다라고 묘사했던 곳에서 헤엄치듯이 두 손을 휘저었다. 입에서는 벌써 도와달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절망으로 넘어가려는 마지막 순간에, 눈이 먼 남자는 다른 남자의 손이 자신의 팔을 가볍게 잡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 작가 조제 사라마구(1922~2010)가 1995년에 발표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 본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던지는 사라마구의 문학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꼽힙니다. 그는 1998년 포르투갈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요.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차 한 대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어요. 뒤쪽에 늘어선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성질 급한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어요.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말했어요. "눈이 안 보여." 이 사건을 시작으로 도시 곳곳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속출했어요. 차에서 눈이 먼 남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안과를 찾았고, 처음 접한 증상인 탓에 여러 의학 서적을 뒤지던 중 안과 의사도 눈이 멀어버렸죠.

실명이 전염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정부는 폐쇄된 정신병원에 눈먼 사람들을 격리해요. 안과 의사가 격리 시설로 들어갈 때 눈이 멀지도 않은 그의 아내 역시 "방금 나도 눈이 멀었거든요"라며 동행했어요. 격리된 사람들은 의료진도 없는 곳에 방치됐어요. 식량만 주기적으로 공급받을 뿐이었죠.

정신병원은 이내 아수라장이 됐어요. 설상가상으로 식량 공급이 끊기자 깡패들이 먹을 것을 독차지하면서 온갖 나쁜 일을 일삼았어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죠.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고스란히 목격했습니다. 의사의 아내는 앞이 보인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두려워하면서도 힘없고 선량한 사람들을 성심껏 도왔어요. 하지만 깡패들의 패악은 더 심해졌고, 의사의 아내는 결국 그들의 우두머리를 가위로 찔러 죽여요. 깡패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병원에 큰불이 났고,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의사의 아내와 일행은 병원을 탈출했지만, 도시는 옛날의 도시가 아니었어요. 병원을 지키던 군인들도 눈이 멀었고, 길거리에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뜯어 먹는 개들이 즐비했어요. 눈이 먼 사람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 벽을 더듬으며 돌아다녔고, 아무 곳에나 배설했죠.

의사의 아내는 몇몇 선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요. 배를 든든히 채우고, 몸을 씻고 오랜만의 평안을 누리고 있을 때, 맨 처음 눈이 멀었던 남자가 시력을 회복했어요. 일행도 차차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의사의 아내는 그제야 눈이 멀게 되지요.

작가는 실명이 전염되는 극한의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과 서로 의지하고 돕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 본성,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게 합니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