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위해 '배다리' 만들어 해협 건넜죠
입력 : 2024.04.17 03:30
역사에서 중요한 다리들
- ▲ 지난달 교각에 화물 컨테이너선 ‘달리’가 충돌해 ‘프랜시스 스콧 키’ 다리가 무너졌어요. /로이터 연합뉴스
이 다리는 1977년에 완공된 2.6㎞의 교량으로, 볼티모어 주변을 지나는 고속도로의 일부였어요. 미국 국가를 작사한 작가 프랜시스 스콧 키의 이름에서 다리 이름을 따왔죠. 지은 지 50년도 되지 않은 다리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게 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에요. 교량 재건에는 20억달러(약 2조7000억원)가 넘는 돈이 든다고 합니다. 또 다리가 무너지면서 화물 물류에 지장이 생겨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실직하는 상황도 우려된대요.
다리는 고대 문명 시기부터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어요. 많은 사람이 오가는 다리는 수많은 정보를 이동시키는 역할을 했죠. 또 반려동물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한다고 여겨지기도 해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리들을 알아볼까요?
페르시아군, 해협 건너려 배다리 만들어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지방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가 이를 진압하면서 시작됐어요.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맞선 이들을 지원했는데, 페르시아가 이를 진압하고 그리스를 공격한 겁니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사위에게 그리스 북쪽 도시 트라키아로 원정을 떠나도록 했지만, 폭풍을 만나 전함과 군사들을 잃고 실패했죠. 이후 페르시아군 약 20만명이 아테네 근교의 마라톤 평야에 상륙해 아테네를 공격했지만 지고 말았어요.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뜻을 이어 기원전 480년 그리스 원정에 나서요. 이 원정길에서 폭이 약 2㎞인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몰래 건너려 배로 다리를 만들었죠. 이 배다리, 즉 선교(船橋)는 배들의 뱃머리를 바닷물의 흐름을 고려해 고정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완성한 임시 다리였어요. 거센 비바람으로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지만, 결국 배 360척과 314척으로 다리 두 개가 완성됐어요. 당시에는 배를 묶을 끈이 마땅치 않아 파피루스 섬유와 아마(종이와 풀)를 사용했어요. 그리고 배 위에 널빤지를 깔고 잔디와 흙을 혼합한 반죽을 올려 발로 밟아 단단하게 고정했죠.
이 다리를 통과한 병사들이 25만명에 달해요. 가축은 7만5000마리까지 건너갈 정도로 튼튼했다니 페르시아의 뛰어난 가교 기술을 짐작해 볼 수 있어요. 이렇게 전쟁사에 남을 배다리 건설 작전을 성공시킨 페르시아였지만, 살라미스 해전과 미칼레 전투에서 그리스가 모두 승리해요.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결국 실패합니다. 이에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일부로 편입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죠. 그런데 임시로 세우는 배다리는 나폴레옹 시대에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때에도 설치됐어요. 최근 분쟁 지역들에도 종종 설치된대요.
수로가 설치된 로마의 다리
로마 제국은 기원전 8세기 무렵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했어요. 기원전 1세기쯤에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부르며, 약 200년 동안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르는 전성기를 맞이했어요. 로마 제국에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분포하게 됐고 넓은 제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건축과 법률 등 실용적인 학문이 발전하게 됐죠.
로마 제국은 사람과 물자가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정복지 곳곳에 도시를 세우고 이곳들을 도로로 연결했어요. 정복지에는 거대한 상하수도 시설을 마련하고, 공중목욕탕이나 원형 경기장을 만들어 자신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자랑했죠. 특히 도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제국 곳곳에 수도교를 설치했어요. 근처 산에서 맑은 물을 가져오고자 수로를 건설했는데 산이 막고 있으면 터널을 뚫고, 협곡이나 계곡이 있으면 다리를 놓았어요.
이렇게 건설된 다리를 수도교라고 부르는데 계곡의 깊이에 따라 1~3층으로 설계했고, 중력을 분산시키는 아치 구조로 건설해 하중을 잘 견디도록 했어요. 물은 맨 위층의 수로를 따라 흘렀고, 1층과 2층은 사람과 말의 통행로로 이용됐어요.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오는 만큼 물이 흐르는 곳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도록 설계했죠.
고대 로마에서는 고위 신관(神官)을 '폰티펙스'라고 불렀는데,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대요. 신의 말을 시민들에게 전하면서 신과 사람의 다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다리를 놓는 지식을 가지고 시민들을 구제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져요.
뉴욕의 상징, 브루클린 다리
미국의 브루클린 다리는 뉴욕의 상징이에요. 맨해튼과 브루클린 자치구 사이 이스트강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다리죠. 브루클린은 1600년대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어요. 1830년대에는 뉴욕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 됐죠. 이곳은 대서양에 접해 있어 뉴욕에서 중요한 항구의 역할을 하게 돼요. 해안에 공장들이 자리 잡고 커지면서 산업 중심지로 성장했어요.
브루클린과 미국의 상업, 금융, 문화 중심지인 맨해튼 사이에서 사람과 물건 등이 이동할 때는 배를 이용해야 했죠. 이에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다리가 계획되고 지어져요. 바로 브루클린 다리입니다. 고딕풍의 석탑과 악기 하프의 현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와이어가 특징적이에요. 브루클린 다리를 처음에 설계한 사람은 존 로블링입니다. 독일계 이민자 출신 미국인이었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존 로블링이 숨지면서 아들 워싱턴 로블링이 공사를 이어받게 됐어요. 하지만 그 아들도 다리를 건설하다가 케이슨병(잠수병)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다리 건설은 워싱턴 로블링의 아내였던 에밀리 로블링이 맡게 돼요. 에밀리 로블링은 독학으로 수학과 교량학을 공부하고, 남편의 설명과 지시를 참고해 공사를 진행했어요. 그렇게 1883년 브루클린 다리가 완성됐습니다. 19세기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토목 공사 현장에서 거친 노동자들을 데리고 일하기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에밀리 로블링이 완성된 브루클린 다리를 보고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꼈을까 싶네요.
- ▲ 무너지기 전 ‘프랜시스 스콧 키’ 다리 모습. /위키피디아
- ▲ 프랑스에 있는 로마 시대 수도교 ‘가르교’. /브리태니커
- ▲ 스페인 세고비아에 있는 로마 시대 수도교. /브리태니커
- ▲ 미국 뉴욕에 있는 브루클린 다리.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