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거란 40만 대군에 맞서 흥화진 지켜… 포로 3만명 구해냈죠

입력 : 2024.04.04 03:30

고려거란전쟁과 양규 장군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이 거란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장면. /빅웨일엔터테인먼트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이 거란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장면. /빅웨일엔터테인먼트
지난달 KBS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종영했어요. 드라마 장면 중 시청자들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려 서북면 도순검사를 지낸 무신 양규 장군이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장면이에요. 지금까지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의 활약은 강감찬 장군 등에 비해 덜 알려졌어요. 하지만 조선 초기 집현전 유학자였던 양성지가 세조에게 위대한 업적을 세운 장군들 위패를 모시자고 건의했을 때,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 강감찬과 함께 양규 장군도 포함했답니다. 흥화진을 끝까지 지켜내려 한 양규 장군에 대해 알아봅시다.

고려와 거란, 전쟁을 시작하다

거란족은 원래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이었어요.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살았죠. 그러다 10세기 초 '야율아보기'라는 지도자가 등장해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해 세운 국가가 '거란'입니다. 거란은 '요(遼)'라고도 했죠. 그런데 거란과 송(宋)나라가 군사적으로 맞서요. 당(唐)이 멸망하고 송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 거란은 후진(後晉)에 군사적 도움을 주고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송은 이 지역을 되찾고 싶었고 결국 거란과 충돌하게 됐어요. 이에 거란은 송과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합니다. 송과 고려가 합심하고 거란을 공격하지 못하게 993년(고려 성종 12년)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죠.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공 의도를 파악했고, 서희를 보내 거란 장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는 송과 맺은 외교 관계를 끊으라는 거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죠.

하지만 고려에서 장군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이 일어나요. 거란은 이 사실을 여진족을 통해 뒤늦게 알았어요. 거란은 '역적 강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1010년 11월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공했습니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이 가장 먼저 마주친 건 고려군의 최전방 요새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지키고 있던 양규였어요.

양규, 거란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흥화진은 고려가 강동 6주를 얻은 뒤 이 지역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995년에 만든 요새입니다. 흥화진은 거란군이 한반도로 손쉽게 진격하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있었죠.

1010년 11월 16일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흥화진을 포위했어요. 이때 양규는 정성, 이수화, 장호 등 휘하 장수들과 흥화진을 끝까지 사수했어요. 그러자 거란 황제는 "목종은 우리 신하였는데 강조에게 시해당했으니 강조를 잡아 보내면 회군하겠다"며 항복을 권했어요. 하지만 양규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거란 황제는 양규가 항복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흥화진에서 방향을 틀어 통주(通州)로 진격했습니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통주성 남쪽에서 거란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하지만 고려군은 크게 패배했고, 강조가 거란군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 거란군은 강조가 쓴 듯이 위조한 편지를 흥화진으로 보내 양규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어요. 하지만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을 받들지 않겠다"며 거절했죠. 오히려 양규는 12월 16일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에서 나와, 통주에 있던 고려 병사 1000명을 구해냅니다. 그러고 거란군 6000여 명과 전투를 벌여 곽주성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고려 백성 7000여 명도 구해냈어요. 이렇듯 양규의 치열한 저항은 계속됐어요.

흥화진 등에서 고려군이 거란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거란의 주력군은 계속 진격해 개경으로 향했어요. 결국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급히 피란을 떠났고, 1011년 1월 거란군이 개경에 입성했습니다. 피란길에서 현종은 거란과 조약을 맺어 전투를 그치고 평화를 회복하는 강화(講和)를 맺어요. '앞으로 고려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조건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흥화진을 중심으로 한 양규의 전투는 계속됐습니다. 양규의 활약은 거란군이 서둘러 강화를 맺고 고려에서 철수하게끔 만들었어요. 그리고 양규는 개경에서 철수하는 거란군을 여러 차례 공격하면서 포로로 잡힌 수많은 고려 백성을 구출하기도 했습니다. 양규가 거란군에게서 구출한 포로는 약 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011년 1월 28일,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의 주력 부대에 포위됐어요. 양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함께 싸우던 군사도 모두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양규는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양규 장군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에 관한 기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양규 장군의 출신과 언제 태어났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거란에 항전하며 활약한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지요. 드라마를 통해 많은 이가 양규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이 관심과 사랑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역사서 '고려사'에 '양규 장군 등이 거란의 40만 대군에도 흥화진을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적힌 부분. /국사편찬위원회
역사서 '고려사'에 '양규 장군 등이 거란의 40만 대군에도 흥화진을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적힌 부분. /국사편찬위원회
사냥하는 거란족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사냥하는 거란족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병사가 밥풀도 떼지 못하고 흥화진 전투에 나서는 장면. /KBS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병사가 밥풀도 떼지 못하고 흥화진 전투에 나서는 장면. /KBS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