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한반도 나비 75만마리 채집해 연구한 '한국의 파브르'
입력 : 2024.02.29 03:30
나비 박사 석주명
- ▲ ‘나비 박사’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석주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부할 시간 아끼느라 땅콩과 두부 먹던 소년
"주명이 좀 봐. 또 땅콩이야." 1921년 평양 숭실고보(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점심시간만 되면 수군거리기 일쑤였습니다. 학우 석주명이 늘 그랬듯이 점심 도시락으로 땅콩을 싸 온 것입니다. 집이 가난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황소 한 마리 값보다 비쌌다는 타자기를 어머니가 선물했을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었는걸요. 이유는 '빨리 먹고 더 공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먹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 두부도 좋아했고, 걸어가면서도 책을 펴 들고 학업에 몰두했다고 해요.
평양 출신인 석주명은 숭실고보에서 개성의 송도고보로 전학했는데, 여기서 교사로 있던 조류학자 원홍구(1888~1970)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스승의 지도를 받아 1926년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업 전문 학교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에 유학한 것이죠. 여기서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 교수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석주명은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의 교사가 돼 1942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는데, 이 시기는 그의 나비 연구가 절정을 맞은 때였습니다. 왜 나비였을까요? 훗날 그는 '생물학과 관계 있는 일을 하고자 했으나 시력에 자신이 없으니 곤충을 택해야 했고, 곤충이라면 누구나 밟는 첫 단계인 나비를 채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한반도 곳곳을 다니며 나비 75만마리 채집
걸어 다니면서 공부하던 그가 나비 채집을 마음먹었으니 과연 얼마나 그 일에 몰두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10여 년 동안 한반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나비가 무려 75만마리였습니다. 이 나비들을 면밀히 관찰해 날개 형태, 무늬와 띠의 색깔 같은 것을 일일이 살피고 통계 수치를 냈습니다. 1936년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라는 논문 한 편을 쓰느라 나비를 16만마리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 학자들 분류에 따르면 조선의 나비는 모두 921종이나 됐습니다. 그러나 석주명은 끈질긴 관찰 결과 그중 많은 것이 사실은 같은 종인데 실적을 올리려다 보니 이름만 다르게 해 놨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결과 조선의 나비는 모두 248종으로 드러났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산 나비 수 250여 종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한 분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의 나비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끈질기게 수행한 국학(國學) 연구의 하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냥 나비가 아니라 '한국의 나비'였던 것이죠. 자연 속 나비뿐 아니라 역사 속 나비도 연구했고, 나비와 관련된 역사 인물, 제주도 등 지역 방언과 향토사까지 연구 범위를 넓힌 것입니다.
석주명이 지은 나비 이름을 들여다보면 우리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볼 수 있습니다. 각시멧노랑나비, 떠들썩팔랑나비, 무늬박이제비나비가 있는가 하면 번개오색나비, 은점어리표범나비, 청띠신선나비도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그 아름다운 자태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합니다. 무척 창의적인 이름도 많은데 '시가도귤빛부전나비'는 날개 뒷면이 당시 서울 시가지 지도와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는 "무릇 우리나라 안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우리와 관계가 있고, 관계가 있는 바에는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나비' 영문 저서 1940년에 출간
1940년에 석주명의 연구는 커다란 결실을 하나 보게 됐습니다.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 지부의 요청으로 '한국의 나비 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이란 영문 저서를 낸 것입니다. 이로써 석주명 이름 석 자가 세계 학계에 알려졌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학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서를 낸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나비 박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박사 학위를 받아서가 아닙니다. '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이라는 뜻에서 '박사'라고 칭하는 것이죠.
1942년 송도고보를 퇴직한 석주명은 경성제대 부설 생약연구소의 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제주와 수원 등에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이 됐죠. 그러나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그를 북한 인민군으로 오인한 사람들에게 총격을 받아 안타깝게 숨졌습니다.
석주명이 평생 모은 나비 표본 75만점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60만점은 교직을 떠날 때 관리하기 어렵게 되자 불태워 화장(火葬)하면서 나비들의 명복을 빌어줬다고 합니다. 나머지 표본 15만점은 서울 남산의 국립과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중 건물이 포격당해 불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석주명의 누이동생이자 평생 우리 옷을 연구한 민속학자 석주선(1911~1996)이 자료 일부를 보관했기 때문이죠. 그는 전쟁 피란길에 자기 수집품을 포기하면서까지 오빠 석주명의 자료를 배낭에 챙겨 갔습니다. 그 덕에 1973년 석주명의 연구 논문을 정리한 '한국산 접류(나비) 분포도'가 출간될 수 있었죠.
석주선은 우리 복식(옷과 장신구)을 비롯한 유물 수천 점을 단국대에 기증했는데, 이 대학 석주선기념박물관에는 석주명이 채집한 나비 32종의 원형 액자 표본 역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 있는 유일한 석주명의 나비 표본입니다. 그리고 석주명의 스승 오카지마 긴지 교수가 재직했던 규슈대에 석주명의 나비 표본 일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알려진 것입니다.
- ▲ 1933년 석주명(왼쪽에서 셋째)이 백두산 채집 여행에서 산꼭대기 호수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는 모습. /단국대
- ▲ 1933년 신문 ‘고려시보’에 실린 송도고등보통학교 전경. 모교이자 교사로도 재직했던 학교예요. /송도고
- ▲ 채집한 나비 표본 중 32마리를 담은 원형 액자. 국내에 남은 유일한 표본으로 단국대가 소장 중이에요. /단국대
- ▲ 1940년 세계 학계를 향해 영문으로 펴낸 저서 ‘한국의 나비 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표지. /아트뱅크
- ▲ ‘시가도귤빛부전나비’. 석주명은 나비 날개 뒷면이 ‘서울 시가지 지도’를 닮았다며 ‘시가도(市街圖)’라는 이름을 붙였대요. /국립생물자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