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中서 음양오행 사상 퍼지며 정착… 우리나라는 묫자리 위주로 발전

입력 : 2024.02.27 03:30

풍수지리

조상 묘가 놓인 땅의 형세가 후손의 운명을 바꾼다는 ‘풍수지리설’을 다룬 영화 ‘파묘’. /쇼박스
조상 묘가 놓인 땅의 형세가 후손의 운명을 바꾼다는 ‘풍수지리설’을 다룬 영화 ‘파묘’. /쇼박스
최근 영화 '파묘'가 흥행하면서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어요. 영화의 내용이 풍수지리와 한국 전통 무속 신앙 등 오컬트(정식 지식 체계에서 다루지 않는 초자연적 현상을 탐구하는 것) 요소를 다루기 때문이에요. 풍수지리설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지어 설명하는 자연관입니다. 풍수지리는 어떻게 등장해서 발전해 온 것일까요?

풍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중국이에요.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에 점점 관련 이론이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한나라(기원전 202~기원후 220) 때 음양오행 사상(세상이 음과 양이 조합한 5가지 요소로 이뤄졌다는 생각) 널리 퍼져 나가면서 풍수지리설도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 시대(676~935)에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풍수지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설이에요. 그러나 그 전에도 자생적으로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여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 신라의 삼국통일 전을 다루는 역사 관련 서적에도 땅의 형세를 살펴 집이나 왕궁 터를 정하고, 전쟁에서 전략과 전술을 짜는 데도 풍수 요소를 활용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풍수지리설은 우리 역사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묘청이라는 승려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서경 천도 운동'을 벌이다 뜻이 이뤄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것 역시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죠. 다만 조선 건국 이후 유교의 영향력이 확장되자, 한국의 풍수지리는 묫자리를 정하는 '음택 풍수' 위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좋은 묫자리를 찾아드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것이죠. 조선 후기에는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농민운동 등 봉기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풍수지리설은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미신으로 치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대에는 지리학의 관점으로 합리적인 요소를 채택해 전통적인 풍수 사상을 재해석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요. 하지만 그 과도기였던 일제강점기에는 여러 오해를 낳기도 했어요. 일본은 풍수지리설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일제의 도시계획 등에는 풍수적 요소가 고려되어 있지 않지만, 풍수지리설이 널리 퍼져 있었던 조선인들의 눈에는 일본의 정책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반도에 피해를 주려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죠. 대표적으로 측량이나 토지 조사 등을 위해 일본인들이 산 등에 쇠말뚝을 박았는데, 이를 본 당시의 농민들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쇠말뚝을 박아 민족 정기를 끊으려고 한 것으로 인식하곤 했어요. 이 주장은 꽤 널리 퍼져 있어서 현재에도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내용이랍니다.


김현철 서울 영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