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대한제국 영빈관… 건립 2년 뒤 외교권 빼앗겨 무용지물로

입력 : 2024.02.15 03:30

재건된 덕수궁 돈덕전

14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지난해 9월 재건했어요. /고운호 기자
14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가 지난해 9월 재건했어요. /고운호 기자
최근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한 소장품 도록 '조명기구'에서 대한제국 궁궐의 대형 샹들리에를 소개했어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조명 회사인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만든 제품이에요. 특징은 장식에 대한제국 황제 문장(국가나 집안 등을 나타내고자 쓰는 상징적 표지)인 이화문(자두꽃 문양)을 썼다는 점입니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의 접견실 회랑에 1904년 무렵 설치된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돈덕전은 어떤 건물이기에 이런 근대 서양식 조명 기구가 달렸던 걸까요?

대한제국의 외교를 위한 영빈관 겸 연회장

'사진 찍기 좋은 예쁜 건물' '인증샷 명소'라는 말이 나오는 건축물이 서울 한복판에 생겨났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00년 전쯤 사라진 건물을 그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죠. 지난해 9월 완공한 덕수궁 돈덕전입니다. 뾰족한 탑과 붉은 벽돌, 푸른색 창틀이 인상적인 근대 서양식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그저 예쁘고 이국적인 겉모습에만 사로잡혀 아무 생각 없이 사진만 찍기에는, 이 건물이 지닌 역사의 상처가 너무나 큽니다. 20세기 초 외교에 실패한 약소국의 슬픔과 망국(亡國)의 설움을 고스란히 안은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의 '5대 궁(宮)' 중에서 덕수궁(경운궁)은 가장 늦게 지은 궁궐입니다. 1897년 고종이 황제가 돼 대한제국을 선포할 무렵 본격적으로 건물이 들어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궁전엔 근대 서양식 건축물도 세워졌는데 바로 석조전과 돈덕전, 중명전이었습니다. 석조전은 임금의 처소로 삼으려고 했으나 막상 1910년 12월 짓고 보니 석 달 전에 나라가 망한 상황이었고, 정작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던 곳입니다.

그럼 돈덕전은 어떤 건물이었을까요. '자주국(自主國)'을 표방했던 대한제국이 서양 열강과 외교를 펼치면서 주권국으로서 이름을 높이려고 한 화려한 공간이었습니다. 외국 사절을 위한 영빈관이자 연회장으로 만든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 건물이죠.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국빈급 외국인 숙소로 활용한 곳이었습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03년 완공된 돈덕전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순(舜)임금의 말인 '돈덕윤원(惇德允元)' 즉 '덕 있는 이를 도탑게 하고 어진 이를 믿는다'는 말에서 건물 이름을 따 왔다고 합니다. 뜻은 무척 좋았죠. 그러나 과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쟁탈전을 일삼고 있던 서양 열강들이 덕 있고 어질기만 한 자들이었을까요?



미국 사절단 방한 두 달 만에 외교권 뺏겨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는 돈덕전의 내부 공간은 대단히 화려했다고 합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의전을 담당했던 독일인 에마 크뢰벨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실내 장식은 놀랄 만한 품위와 우아함을 뽐낸다.' '접견실은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장식됐다. 황금색 비단 커튼과 황금색 벽지, 이에 어울리는 가구와 예술품, 이 모든 가구는 황제의 문양인 자두꽃으로 장식됐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살며 수탈받는 백성들의 피눈물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숙박한 대표적 외국인은 누구였을까요. 1905년 9월 벌어진 '미국 공주 행차 소동'의 주무대가 바로 돈덕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사절단과 함께 대한제국을 방문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돈덕전에 묵은 것이죠.

국권 침탈을 눈앞에 두고 강대국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고종은 앨리스를 '미국 공주'쯤으로 여기고 황실 가마로 모시며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그러나 앨리스와 미국 사절단이 보기에 고종의 이런 호들갑은 무척 서글프면서도 우스운 모습이었을 겁니다.

사절단은 이미 두 달 전인 1905년 7월 일본에 먼저 들러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에 동의한다'는 밀약에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입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용인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곰 인형 '테디 베어'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면 그의 12촌으로 훗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앨리스는 나중에 고종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황제다운 존재감이 없이 애처롭고 둔감했다." 미국 사절단이 떠난 지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더 이상 외국 사절이 대한제국에 찾아올 일이 없게 됐던 것이죠.



'빛 좋은 개살구' 꼴이 돼 버린 건물

외교를 위해 지은 돈덕전은 완공 2년 만에 사실상 기능을 잃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서양 각국에 밀서를 보내 일제의 침략을 막아 달라고 호소했으나 더 이상 외교권이 없는 나라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이 빌미가 돼 1907년 7월 강제로 퇴위당했는데, 그 아들 순종이 다음 달 즉위식을 올린 장소는 얄궂게도 돈덕전이었습니다. '즉위식 현장이라니 참으로 역사적인 장소가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임금을 마음대로 바꾼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즉위식'이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쓸모없는 건물이 된 돈덕전은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됐고 1920년대 초 일제가 철거했습니다. 1930년대엔 그 자리에 어린이 놀이공원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100년 만에 다시 지은 돈덕전은 자료 부족 때문에 내부 공간을 원형과 다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고, 애초 돈덕전을 '복원'하겠다고 했던 문화재청은 '재건'이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미국과 영국 두 강대국의 공관 사이 절묘한 위치에 지었던 돈덕전은,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지해 연명(延命)을 노린 굴욕적 역사의 상징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금으로 빛나는 화려한 연회장과 황제국의 의전, 말로만 '자주'를 외치는 외교 같은 것으로는 결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건물이 바로 돈덕전입니다.
나라가 망해 무용지물로 전락했던 1910년대 돈덕전. /문화재청
나라가 망해 무용지물로 전락했던 1910년대 돈덕전. /문화재청
1907년 돈덕전 2층 발코니에서 순종(왼쪽)과 고종(가운데)이 흰 평상복 차림으로 일본군이 대포를 진헌(임금에게 선물을 바치는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요.
1907년 돈덕전 2층 발코니에서 순종(왼쪽)과 고종(가운데)이 흰 평상복 차림으로 일본군이 대포를 진헌(임금에게 선물을 바치는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요.
1905년 대한제국을 찾은 앨리스 루스벨트(가운데) 일행이 주한미국 공사관(현 미국 대사관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어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는 방한 중에 돈덕전에 묵었어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5년 대한제국을 찾은 앨리스 루스벨트(가운데) 일행이 주한미국 공사관(현 미국 대사관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어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는 방한 중에 돈덕전에 묵었어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과거 돈덕전의 내부. 재건된 돈덕전은 자료 부족으로 내부는 제대로 되살리지 못해서 ‘복원’이 아니라 ‘재건’이라는 표현을 써요. /미국 코넬대 희귀 문서 컬렉션
과거 돈덕전의 내부. 재건된 돈덕전은 자료 부족으로 내부는 제대로 되살리지 못해서 ‘복원’이 아니라 ‘재건’이라는 표현을 써요. /미국 코넬대 희귀 문서 컬렉션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장근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