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광개토대왕비·장군총 있어요
입력 : 2024.02.08 03:30
고구려 국내성 유적지
- ▲ ①지난 2012년 중국 지안에서 주민에 의해 발견된 비석 '지안 고구려비' 탁본. 고구려 건국 설화를 설명하는 글이 담겨 있어요. ②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에요. ③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 ④지안 시내에 남아 있는 고구려 두 번째 수도 '국내성' 성벽의 일부. /조선일보DB·위키피디아·동북아역사재단
현재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안 일대는 한때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비 외에도 고구려 시대의 성곽과 고분 등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분포해 있어요. 지안으로 함께 가서 고구려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지안, 고구려 전성기의 발판을 다진 곳
고구려는 7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수도를 두 차례 옮겼어요. 첫 번째는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두 번째는 국내성에서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죠.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이었던 국내성이 바로 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 일대입니다.
국내성이 위치한 지안은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는 곳이에요. 기후도 농사짓기에 알맞았기 때문에, 비옥하기로 유명한 중국의 강남 지역에 빗대 '소강남(小江南)'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안은 여러 산이 북쪽을 감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또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通溝河)강이 흐르죠. 이렇듯 지안은 산과 강이 '자연 방어벽' 역할을 해 도읍으로 두기에 적합한 곳이었어요. 또한 압록강을 수로 교통망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어요.
현존하는 국내성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4세기 무렵에 축조됐다고 해요. 국내성 내부에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의 왕궁과 여러 관청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고구려는 지안을 수도로 삼았던 시기에 국력이 커지면서 뒤이어 전성기를 맞이할 발판을 마련했어요. 국내성은 현재 그 일부만 전해지지만, 남아있는 성벽과 그 흔적을 통해 당시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강력했던 왕권 상징하는 장군총·태왕릉
고구려 초기에는 시신을 주로 흙이 아닌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어요. 이러한 무덤 양식을 돌무지무덤 또는 적석총(積石冢)이라고 부릅니다. 무덤은 한 집단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신기한 점은 서울 석촌동 고분군처럼 백제 시대의 무덤도 고구려와 유사한 돌무지무덤 양식으로 조성됐다는 것이에요. 이는 고구려와 백제 지배층이 관련이 있음을 의미하죠.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 출신이라고 적힌 문헌 기록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주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백제 시대의 돌무지무덤이 남아 있는데,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돌무지무덤은 특히 지안 일대에 다수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장군총(將軍冢)과 태왕릉(太王陵)입니다. 학계에선 장군총과 태왕릉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가에 대해서 논의 중이에요. 하지만 두 무덤은 고구려가 국내성을 도읍으로 삼던 시기 국왕이 가지고 있던 권력의 크기와 지배력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어요.
장군총은 지안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7.5㎞ 정도 떨어진 곳에 혼자 위치해 있어요. 현지 주민들은 이 무덤을 일찍부터 장군총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5세기 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돌무지무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축조 기술도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축조 양식이나 규모로 보았을 때 장군총이 왕릉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어요.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다만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이라고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발맞춰 장군총은 장수왕릉일 것이라 파악하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태왕릉은 장군총에서 서남쪽으로 2㎞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해요. 지금은 무덤 위쪽 절반이 파괴되어서 원형을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원래 면적은 장군총에 비해 4배 정도 컸다고 해요. 태왕릉에서 1913년 출토된 벽돌에는 '바라건대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뫼처럼 튼튼하소서'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요. 이를 보고 사람들은 이 무덤을 태왕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광개토대왕이 이 무덤의 주인이라고 추정하는 의견은 그보다도 먼저 나왔어요.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릉은 거리가 300m 정도일 만큼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공식적인 호칭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인데, 태왕릉에서 '호태왕(好太王)'이 새겨진 청동 방울이 발견돼 무덤의 주인이 광개토대왕일 것이라는 주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우연히 비석 발견… "고구려 시조는 주몽"
지난 2012년 지안의 한 주민이 마을에 있는 다리 근처에서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현장에 전문가가 파견돼 글자를 확인해봤더니, 광개토대왕릉비와 연관 있는 고구려 시대 비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후 중국에서 정밀 판독을 거쳐 비석의 명칭을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로 정했고, 학계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지안고구려비는 손상이 심한 채로 발견되어 완전한 해독이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비문의 해석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문에서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문 서두에는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개창하셨도다. 하늘과 달의 아드님이시자 하백(河伯)의 후손으로서 신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고 강토를 개척하셨다. 후사(後嗣)로 이어져 서로 계승하였다"라고 새겨져 있어요. 여기서 '추모(鄒牟)'는 '주몽(朱蒙)'과 같은 말이고, 하백(河伯)은 주몽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 설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지안고구려비에서는 고구려가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개창하여 대대로 이어져 온 국가'라는 것을 고구려인이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