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9·11 테러와 식민지 아픔 만져준 '다정한 뮤지컬'들
입력 : 2024.01.01 03:30
'컴 프롬 어웨이'와 '딜쿠샤'
- ▲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 공연 장면. /쇼노트
합창곡 부르며 9·11 아픔 치유해요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9·11 테러'를 배경으로 해요. 이슬람 테러 단체가 민간 항공기 4대를 납치해 저지른 사건으로, 탑승객 266명 전원이 사망했어요. 이 외에 비행기가 충돌한 110층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국방부 청사 등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가 최다 3500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큰 비극이었죠. 미국은 '테러와 전쟁'을 선포하고 용의자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의 은신처가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결국 9·11 테러는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 의 원인이 됐어요.
긴박했던 9월 11일 그날, 미국 하늘이 전면 봉쇄되면서 캐나다 정부는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 편을 가까운 캐나다 공항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착륙시키는 일명 '노란 리본 작전'을 폅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작은 공항 갠더 국제공항은 대서양을 거쳐 도착하는 첫째 공항이어서 비행기가 무려 38대 착륙합니다. '멀리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의 '컴 프롬 어웨이'라는 제목은 바로 갠더 마을에 도착한 비행기 38대에서 내린 탑승객 7000명을 의미하죠.
작가 아이린 산코프와 작곡가 데이비드 헤인은 '9·11 테러'를 분노와 상처, 슬픔의 이야기로만 그리지 않았어요. 화염에 싸인 채 무너져 잿더미가 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폭파된 비행기 파편은 우리를 서로 아프게 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대신 9·11 테러가 일어난 그날, 캐나다 갠더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비행기 탑승객의 우연과도 같은 만남을 보여줘요.
사흘을 함께 보낸 마을 사람들과 탑승객들은 서로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9·11을 다르게 기억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배우 12명은 각자 사연이 있는 탑승객과 또 각자의 삶을 살고 있던 갠더 사람들을 일인 다역으로 연기합니다. 하지만 이 공연에 주인공은 없어요. 누구 한 사람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연대가 가진 힘을 보여주죠. 그래서 뮤지컬 음악도 대부분 합창곡이랍니다.
실제 서양식 주택 소재로 한 '딜쿠샤'
뮤지컬 '딜쿠샤'는 서울 종로구 행촌동 언덕 위에 있는 낡은 벽돌집에 대한 이야기예요. 뮤지컬 제목 '딜쿠샤'는 이 집 이름입니다.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을 뜻하는 딜쿠샤는 실제 인도에 있는 궁전 이름이기도 해요. 이 집 첫 번째 주인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린리 테일러 부부였어요.
금광 기술자였던 앨버트 테일러는 1897년 사업을 하려고 우리나라에 와 인연을 맺어요. 1919년 고종 승하(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를 취재하며 AP통신사 특파원으로도 활약했죠. 그리고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 아들 브루스와 함께 살 집을 짓습니다. 이 집이 바로 딜쿠샤예요. 이 아름다운 집을 사랑한 아내 메리가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죠.
앨버트 테일러 가족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테일러 형제가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일본 도쿄로 반출해 3·1 운동이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거든요. 앨버트는 경성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난 외아들 브루스의 요람 밑에서 우연히 독립선언서를 발견했어요. 독립선언서와 자신이 작성한 기사를 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했죠.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가져갔고,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어요. 앨버트가 전달한 독립선언서는 영문으로 번역됐고,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실렸습니다.
이후 테일러는 1919년 제암리 학살 사건 취재에도 앞장서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어요. 결국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테일러 가족은 미국으로 쫓겨납니다. 미국 땅에서 우리나라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산 테일러는 1948년 세상을 떠났고, 우리나라 땅에서 잠들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묻혔어요.
테일러 가족이 떠난 뒤 딜쿠샤는 같은 자리를 지키며 6·25전쟁 후 집을 잃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어요. 뮤지컬은 테일러의 외아들 브루스와 딜쿠샤에서 40년 넘게 살고 있는 할머니 '금자'가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제 인생 마지막을 향해 가는 미국인 브루스와 한국인 금자 할머니의 따뜻한 편지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기억하는 집의 역사를 알 수 있죠.
두 작품은 찬 바람과 거친 파도를 건너온 타인을 환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또 그렇게 건너온 타인이 원주민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2024년 새해에는 더욱 다정해져요, 우리.
- ▲ 뮤지컬 '딜쿠샤' 공연 장면. /국립정동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