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용의 발톱' 왕 옷엔 5개, 세자는 4개 그려 구별했죠
입력 : 2023.12.28 03:30
조선 시대 궁중 자수
- ▲ ①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이 1922년 귀국해 순종을 만날 때 입었던 곤룡포. ②영친왕 곤룡포에 달린 오조룡보. ③고종 황제 때 곤룡포 등에 자수를 놓기 위해 사용한 목판. 오조룡이 앞을 바라보는 무늬예요. ④무릎을 가리는 헝겊 '폐슬'에 자수를 놓기 위한 밑그림(왼쪽)과 영친왕비가 실제 사용한 폐슬. ⑤영친왕비가 1922년 순종을 만날 때 착용했던 적의(翟衣). /국립고궁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경국대전'에 장인 숫자 정해
상의원(尙衣院)은 공조(조선 시대 중앙 관청인 육조 중 하나) 소속 관청으로, 왕실에 필요한 수공업 제품을 생산했어요. 상의원 소속 장인은 세종 때 467명이었고, '경국대전'에는 68종 597명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나와요. 시대에 따라 인원 변동이 있었지만, 장인 600여 명이 왕실 수공업 제품을 만들었어요. 대표적으로 의복, 무기, 금은보화, 마구(馬具), 악기, 빗 등이 있었어요.
'경국대전'에는 상의원 내 수공업 유형별 장인 수가 상세하게 규정돼 있었어요. 직물 제직(製織) 관련 5종 220명, 염색 관련 4종 26명, 옷감 손질 및 복식 제작 7종 74명, 관모(관리가 쓰는 모자)류 6종 20명, 신발류 3종 22명, 가죽이나 모피류 9종 40명으로 정해진 것을 보면, 상의원 장인은 대부분 의복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고 할 수 있어요.
상의원 장인이 옷을 만드는 과정은 철저한 분업이었어요. 연사장이 실을 뽑아내고 합사장이 실을 꼬아 합치면, 홍염장과 청염장이 염색 작업을 하고, 능라장과 방직장이 천을 짰어요. 도련장과 도침장은 만든 직물을 다듬질해 정리했고, 침선장은 의복을 만들었어요. 세답장은 의복을 손질했고, 다회장·매듭장·도다익장 등은 의복의 부속품을 제작했어요.
바느질과 자수를 담당한 침선방
상의원에서 옷감 손질과 복식에 종사하는 74명 중 40여 명은 침선방에서 바느질(침방)과 자수(수방)를 담당했어요. 왕실에서 사용하는 의복과 생활용품은 정한 법도에 따라 제작하고, 그 위에 왕실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자수 장식을 했어요. 자수를 담당하는 '수방'의 여성 장인은 왕실에서 일하는 여성의 추천을 받아 보통 6~7세에 궁에 들어왔다고 해요. 대개 15년 수련 기간을 거쳐 35년을 궁에서 근무하면 정5품 상궁 직책을 받았다고 해요.
숙련된 수방 장인이라도 자수를 놓으려면 밑그림인 수본(繡本)이 필요했어요. 비교적 간단한 수본은 장인이 직접 그렸으나, 왕실 의복과 생활용품 수본은 도화서의 화원이 그렸어요. 수본은 재료에 따라 목판 수본과 유지(기름종이) 수본으로 구분해요. 목판 수본은 나무판에 수놓을 문양을 조각한 것으로, 화원이 종이 위에 그린 문양을 조각장이 나무판에 옮겨 새겼어요. 양각으로 새긴 목판에 먹을 묻혀 종이에 찍고, 이를 오려내 옷감 위에 대고 수를 놓았어요. 유지 수본은 기름종이 위에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에요. 유지에 그린 밑그림은 여러 단계를 거쳐 옷감 위에 옮겨졌어요. 도화서의 화원, 조각장 등이 수본을 완성하고, 수방의 여성 장인이 전통 자수 기법에 따라 수를 놓았어요. 이들의 노력으로 완성한 옷과 생활용품은 섬세한 바느질과 색실의 조화가 뛰어나 지금까지도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어요.
왕과 왕비 의복에 넣은 용 무늬 자수
조선 시대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복식 종류와 옷감 종류, 색, 문양, 장식 등이 달랐어요. 궁중 복식 제도는 명나라 복식 제도를 본받았고, 1474년(성종 5년) '국조오례의'에 그 기준을 정했어요. 왕과 왕세자, 왕비와 왕세자빈의 옷은 특별히 '의대(衣襨)'라고 했는데, 중요한 왕실 행사가 있을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새로 지었어요.
왕의 의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랐는데, 먼저 즉위식이나 혼인식, 종묘사직의 제례, 중국 사신 접견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식 때는 면류관(冕旒冠)에 구장복(九章服)을 입었어요. 편전에서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의논할 때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었어요. 면류관은 중국에서 유래해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 국왕이 썼던 왕관인데, 조선 왕은 9줄 면류관을 썼어요. 구장복 상의에는 양(陽)에 해당하는 다섯 문양을 채색으로 그리고, 하의에는 음(陰)에 해당하는 네 문양을 그렸어요. 그리고 무릎을 가리기 위해 화려한 문양을 수놓은 폐슬(무릎을 가리는 헝겊)을 달았어요.
왕비의 의대는 왕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어요. 왕비가 입는 최고 의례복은 적의(翟衣)였는데, 오색실로 수를 놓고 테두리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한 꿩 무늬 의복이었어요.
왕과 왕비가 입는 의대에는 오조룡(발톱이 5개 있다는 전설의 용)과 구름을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천을 가슴, 등, 어깨에 붙였어요.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으며, 발톱 수로 지위를 나타냈어요. 왕과 왕비는 발톱이 5개인 오조룡,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발톱이 4개인 사조룡을 붙였어요. 1892년(고종 29년)에는 '국조오례의'를 보강하면서 국왕은 붉은 곤룡포에 금사(금실)로 수놓은 오조룡보를 달도록 했어요. 1897년(광무 원년)에는 황제 등극을 계기로 황색 곤룡포에 오조룡보를 달도록 했어요.
왕실에서는 옷, 이불, 방석, 병풍 등에 자수를 놓았는데, 시간과 인력이 많이 필요했어요. 따라서 왕실에서도 국가 행사, 왕실 혼례 등을 제외한 일상에서는 색상이 들어간 문양 비단이나 옷 위에 직접 수를 놓는 화려한 장식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했어요. 또 민간에서는 원칙적으로 옷이나 생활용품에 수놓기를 금지했어요.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전유물이었던 자수품이 민간에 확대됐고, 그 과정에서 평안남도 안주와 전라북도 순창을 중심으로 상업 자수가 발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