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암각화에 낙서, 고인돌 바닥돌도 빼내… 복구 어려워
입력 : 2023.12.21 03:30
문화재 훼손 사건들
- ▲ 2007년 2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 소재 삼전도비가 붉은 스프레이로 훼손된 모습.
스프레이 뿌린다고 '치욕의 역사' 사라질까
"아니, 이게 뭐야?" 2007년 2월 3일 저녁 9시 40분쯤 일이었어요. 청소를 위해 서울 송파구 석촌동 한 공원을 찾은 구청 직원은 깜짝 놀랐습니다. 높이 4m에 가까운 커다란 비석 앞뒤에 붉은 스프레이로 쓴 '철' '거' '병자' '370'이라는 글자가 있었던 거예요. 스프레이로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이번 경복궁 담장 사건과 비슷한 일이었죠. 쓰인 글자는 아마도 '병자호란(1636~1637)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2007) 이것을 철거해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비석은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삼전도비'였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청나라는 인조 임금이 항복했던 자리에 청 태종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도록 요구했습니다. 비문을 쓴 이경석이란 선비가 "글을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고 한탄했다는 얘기도 전합니다. 이후 고종 때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비석을 엎어 버린 적이 있었고, 제1공화국 때는 아예 땅에 파묻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보기에 불편한 치욕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스프레이 훼손 사건이 일어난 뒤인 2010년 삼전도비는 원래 자리인 석촌호수 서호 동북쪽으로 이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스프레이로 비석을 훼손한다고 해서 있었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승자였던 청나라 만주족은 쇠퇴했고 패자였던 우리가 번영하는 지금, 오히려 그 치욕의 흔적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5시간 만에 불탄 숭례문, 복구엔 5년
3개월 만에 복원 작업이 끝난 삼전도비 훼손 사건은 더 큰 사건을 앞둔 일종의 서곡(序曲)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온 국민을 경악하게 했던 '국보 1호 방화(放火·일부러 불을 지름) 사건'이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났기 때문이죠. 2008년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월 10일,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70대 남성이 서울 숭례문(남대문)에 불을 질렀습니다. 소방차 32대가 현장에 출동했으나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고,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의 숭례문 현판이 땅에 떨어지고 누각이 붕괴하는 대참사가 고스란히 TV로 중계됐습니다.
조선 초인 1398년(태조 7년) 건립됐던 서울의 관문 숭례문은 이 사고로 문루 2층의 90%, 1층의 10%가 소실(불에 타서 사라짐)돼 버렸습니다. 불을 지른 지 불과 5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위원회는 누각 밑 석축(돌로 쌓아 만든 벽) 대부분이 온전하고 역사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보 1호 지위를 유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지금은 국보나 보물의 번호가 사라졌습니다. 당시에도 '1호'라는 것은 관리를 위한 번호일 뿐 가장 가치가 크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숭례문 복구에는 이후 5년의 세월이 걸렸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복구 과정에서도 부실과 비리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숭례문 방화 사건이 가져온 긍정적 결과는 단 한 가지, '문화재는 한순간에 훼손될 수 있고, 그 경우 다시 제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교훈이었습니다.
국보 암각화 위에 '친구 이름' 낙서
아직 숭례문 복구 공사가 한창이던 2011년 8월, 이번엔 울산의 국보 '천전리 암각화(천전리 각석)'와 관련한 기절초풍할 일이 알려졌습니다. 또 다른 국보인 '반구대 암각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암각화는 길이 9.5m, 높이 2.7m 바위 위에 도형과 그림, 글씨를 새긴 문화재입니다. 그 시기는 청동기 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있죠. 선사시대와 고대 문화의 단면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이 바위에 누군가 큼지막하게 '이○○'이라는 사람 이름을 흰 글씨로 써넣은 낙서가 발견됐습니다. 경찰 수사 결과 수학여행을 온 고등학생이 장난 삼아 친구 이름을 쓴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관할 지자체는 1년 동안이나 낙서 훼손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빈축(눈살을 찌푸림)을 샀습니다. "그곳에 낙서하는 짓이 숭례문에 불을 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왜 모르느냐"는 질타도 이어졌죠. 이후 천전리 암각화엔 비싼 CCTV와 경보 장치가 설치됐습니다. 소를 잃었지만, 외양간을 고쳤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훼손된 문화재는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다
문화재 훼손 사건은 이 밖에도 많았습니다. 2017년 9월엔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인 울산 언양읍성 성벽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욕설 등을 쓴 사건이 일어났고, 2021년 12월에는 경기 여주의 경기도 지정 문화재 영월루가 검은색 스프레이로 10여 군데 훼손됐습니다. 지난해엔 세계 최대 고인돌 유적으로 평가받는 경남 김해 구산동 지석묘가 어이없게도 지자체에 의해 훼손됐는데, 유적 정비 공사 중 바닥돌을 빼내고 고압 세척 처리를 해 원형을 망가뜨렸습니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체포 당시 "문화재는 복원하면 되지 않느냐"고 뻔뻔하게 말해 사람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막대한 복구 금액을 충당하는 국민 세금, 문화재 훼손으로 인한 많은 사람의 정신적 피해는 별것 아니라는 걸까요?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한 번 훼손된 문화재는 100%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문화재는 그저 낡은 유물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 속 인류 문화가 후세에 남긴 흔적이자 유산입니다.
- ▲ 2008년 2월 불탄 숭례문(남대문) 잔해. /이명원 기자
- ▲ 2011년 9월 국립 문화재 연구소 문화재 보존 과학 센터 관계자들이 울산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에 새겨진 낙서를 제거하는 모습. /울산시
- ▲ 지난 17일 오전 복구 작업을 위해 서울 종로구 경복궁 서쪽 담벼락을 찾은 문화재청 관계자가 낙서로 훼손된 부분을 가리키는 모습. /남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