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세 대륙 걸친 대제국… 근대화 실패하며 623년 역사 막 내려
입력 : 2023.11.01 03:30
오스만 제국의 멸망
- ▲ 술레이만 1세를 나타낸 판화. /브리태니커
안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제국
16세기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당시 통치자 술레이만 1세는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문학·과학·예술·건축 등 분야에서 유럽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황금기를 열었어요. 하지만 17세기 오스만 제국은 긴 정체와 쇠퇴기에 들어섰죠. 우선 술탄의 능력과 자질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국가에서 금지한 술을 너무 좋아해 '주정뱅이'라는 별명을 얻은 통치자도 있었고, 값비싼 검은 담비 가죽으로 궁전을 장식하며 사치를 일삼은 통치자도 있었어요.
나이 어린 술탄이 잇따라 즉위한 것이 문제였지만, '카페스 제도' 또한 술탄의 무능을 심화했습니다. 당시 새 술탄이 즉위하면 그의 형제들은 '카페스(새장이라는 의미)'라 부르는 곳에 갇혀 생활했어요. 이들은 나중에 술탄이 될 자격이 있었지만, 끊임없이 감시당하며 바보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행정 경험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즉위한 술탄이 이끄는 제국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죠.
둘째 문제는 술탄의 근위대이자 상비군인 '예니체리'의 부패였어요. 이슬람교도로만 구성된 예니체리는 최정예 부대로, 그들의 충성심과 기상은 제국 확장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어요. 전역 전까지 결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죠. 하지만 국가에 공헌한 만큼 결혼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쳐 결혼을 허용했고, 자식에게 예니체리직을 세습하며 기강이 점차 해이해졌습니다. 봉급 인상을 요구하는 반란이 잦아졌고, 술탄 등극과 폐위에 관여할 만큼 정치력을 갖게 됐어요. 술레이만 1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하고, 적절한 보수가 나올 때까지 술탄 즉위를 방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술탄이 예니체리를 개혁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어요.
군사·경제 제도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티마르 제도'의 붕괴도 제국이 쇠퇴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티마르 제도는 중앙에서 토지를 받은 지방 토지 소유주가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전시(戰時)에는 기병을 제공하는 일종의 군사적 봉건제였어요.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기근 등으로 토지 생산력이 낮아지고, 티마르로 지급할 수 있는 토지가 줄었어요. 지방 기병이 줄어들자 봉급을 받는 예니체리가 늘어나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죠. 재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농민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티마르 제도가 붕괴하며 지방에선 농지를 사들인 '아얀(큰 농지를 가진 토호)'이라는 세력이 등장했어요. 이들은 막강한 경제력에 더해 중앙군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병력을 소유했죠. 점차 그들은 지방 행정 관리에 임명되고, 세금 징수권까지 갖게 됐어요. 아얀의 성장은 오스만 제국의 지방 분권화를 앞당겼습니다.
서구화 개혁 시도했지만 보수층 반발로 실패
반면 같은 시기 유럽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어요. 신항로 개척 이후 대서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물자를 가져왔고, 식민 시장을 개척했죠. 16세기 이전만 해도 지중해를 장악한 오스만 제국은 향신료 판매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어요. 하지만 유럽이 인도로 향하는 새 무역로를 개척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외부 세계 변화에 대응하기보다 내부 질서 수습을 더 시급하게 여겼어요.
물론 18세기 들어 여러 술탄이 서구화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군사 국가인 오스만 제국은 주로 군사 개혁에만 관심을 뒀고, 이마저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 집단의 반발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어요. 결국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와 무역 통상 조약을 체결할 때 문제점이 드러났어요. 오스만 제국은 유럽 자본주의에 그대로 영향을 받았고, 사치품을 비롯한 유럽 상품이 대거 밀려들면서 국내 생산품이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군사 국가'라는 명성도 점차 빛이 바랬어요. 오스만 제국이 1683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중부 유럽을 두고 대립하며 빈을 침공한 사건은 제국의 종말을 예고했어요. 많은 군사와 넓은 평원을 잃었거든요.
1853년부터 러시아와 벌인 크림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실질적 이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자 외채를 끌어들였어요. 처음에는 국내 비(非)무슬림에게 신용 대출을 받았고, 전쟁 후에도 재정 고갈과 경제난이 지속하자 영국과 프랑스에서 외채를 가져다 썼죠. 이후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1876년 정부는 파산을 선언했어요. 오스만 제국 재정은 유럽계 은행의 통제를 받게 됐고, 이를 계기로 광산·철도·전기·전화·가스·전차 등 사업에 유럽 자본주의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하며 역사 속으로
이렇게 쇠락해가던 오스만 제국은 제1차 발칸전쟁으로 결정타를 맞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발칸반도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독립을 외치며 제국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이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어요. 곧이어 일어난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에 끼었다가 패전하고 맙니다.
오스만 제국 군 장교 출신인 무스타파 케말은 서구 열강에 저항하며 새로운 독립국을 세우려 했고, 이 과정에서 허울뿐인 술탄직을 폐지했어요.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선포됐습니다.
- ▲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있는 술레이마니예 모스크. 술레이만 1세의 명에 따라 16세기 중반 세워졌어요. /브리태니커
- ▲ 1877년 미국 정치 잡지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풍자화. 오스만 제국을 나눠 갖는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을 그렸어요.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