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예술을 남긴 '천재' 기형도와 이상의 詩·사랑이 연극으로

입력 : 2023.10.30 03:30

기형도 플레이와 라흐 헤스트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조치원’을 다룬 장면.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조치원’을 다룬 장면. /맨씨어터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두 시인의 삶과 시가 공연으로 제작돼 무대에 올랐습니다. 독창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친 기형도(1960~1989)의 시를 바탕으로 구성한 연극 '기형도 플레이'(19~2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아트원씨어터)와 '천재 시인'이라 불린 이상(1910~1937)과 그의 아내 변동림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뮤지컬 '라흐 헤스트'(6월 13일~9월 3일, 서울 종로구 드림아트센터)가 공연을 마쳤습니다. 두 시인 모두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한국 문학사에 길이 기억되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스물아홉에 요절한 시인의 시 9편

연극 '기형도 플레이'는 시인 기형도의 삶에 주목하는 대신, 그의 시를 짧은 이야기로 발전시킨 단막극 9편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작품입니다. 1989년 발간된 유고 시집 '잎 속의 검은 입'에 수록된 시 62편 중 9편을 다루죠. 기형도의 시에는 가난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사랑의 상실 등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1980년대 불안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으로서 깨달은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현실,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죠.

연극 속에 등장하는 시 9편은 각기 다른 작가 9명의 사유 속에서 희곡으로 바뀌어 무대에 올랐어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서정적이면서 쓸쓸한 시구(詩句)로 유명한 '빈 집'을 비롯해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로 시작하는 독특한 시 '소리의 뼈',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 조치원이라 쓴 네온 간판 밑을 사내가 통과하고 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인 '조치원'을 다뤘습니다. 그 외에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흔해빠진 독서' '바람의 집' '질투는 나의 힘' '기억할 만한 지나침' '위험한 가계 1969' 등이 무대에 오릅니다.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시 '안개'로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던 기형도 시인은 스물아홉 생일을 엿새 앞둔 날 뇌졸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기형도 현상'이라 불릴 정도로 고인(故人)이 남긴 작품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어요. 시인 사후 10주기를 기념해 발행된 '기형도 전집'이 그 결실이죠. 2017년에는 시인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경기 광명시에 '기형도문학관'이 개관해 그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 그리고 두 예술가의 아내이자 수필가와 미술평론가로 주체적인 일생을 살았던 김향안(1916~2004)의 삶을 바탕으로 해요.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인데, 극 중에선 시기를 구분해 시인 이상과의 만남과 이별까지는 '동림'역으로, 화가 김환기와의 만남부터 여생까지는 '향안' 역으로 설정합니다. 동일 인물이 2인 1역으로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이상 역시 김해경이라는 본명이 따로 있는데, 이상이라는 이름은 절친한 친구였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선물한 화구 상자에서 지었다고 하죠. 이 화구 상자가 오얏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 '오얏나무 상자'라는 의미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김해경이라는 본명보다 이상이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와 소설을 즐겨 읽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변동림은 1936년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핫플'이었던 다방 '낙랑파라'에서 젊은 시인 이상을 만났습니다. 뮤지컬 속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각설탕만 만지작만지작'이라는 노래와 함께 묘사돼요. 최근 들어 낙랑파라에 자주 나타나는 책벌레 변동림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는 이상의 심리를 표현하죠.

이상이 동림에게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면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집니다. 많은 이들이 이상이 쓴 시를 난해하고 별나다고 무시했지만, 동림은 이상의 시를 이해하고 아낍니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요. 실제로 이상이 쓴 '오감도'는 신문 연재를 하다가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 속에서 중도에 끝나기도 했습니다. 문법을 무시하거나 수학 기호를 나열하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이상의 시는 당시 한국 문학에서 시도된 적이 없었던 파격미를 선보였죠. 지금까지도 이상이 남긴 시는 문학의 형식을 질문하는 선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상은 변동림과 3개월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을 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34일간 구금됐어요. 불령선인은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중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이들을 지목해 만든 용어입니다. 이때 이상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고, 결국 1937년 27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일본 땅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후 변동림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김환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1944년 재혼해요. 그와 여생을 보낼 때는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뮤지컬 제목 '라흐 헤스트'는 생전 김향안이 남겼던 말로 프랑스어로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l'art reste)'라는 뜻이에요. 이 말처럼 이상과 김환기, 그리고 그들의 아내였던 김향안은 모두 떠나고 없지만, 이들이 남긴 시와 그림은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다룬 장면. /맨씨어터
연극 ‘기형도 플레이’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를 다룬 장면. /맨씨어터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 장면. /홍컴퍼니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 장면. /홍컴퍼니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 장면. /홍컴퍼니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 장면. /홍컴퍼니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