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홀로코스트 위로하고, 소련의 체코 침략 비판했죠
입력 : 2023.09.25 03:30
20세기 반전 음악가
- ▲ 독일 쾰른에 있는 게슈타포 감옥. /독일 쾰른 관광청
구레츠키처럼 20세기 중반을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 기간 무자비한 학살, 안타까운 이별과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이 시기 활동했던 작곡가들은 음악을 통해 고통의 극복과 위로, 희망을 전했죠. 오늘은 유럽 변방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언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한 작곡가들과 대표작을 알아보겠습니다.
조국 폴란드 위해 곡 쓴 헨리크 구레츠키
구레츠키는 폴란드 남서부 마을 체르니차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지만, 두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져 음악 공부에 어려움을 겪었죠. 20대 초반부터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것은 1955년 카토비체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60년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8년 모교 교수가 돼 197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구레츠키의 초기 작곡 스타일은 급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좀 더 온건하고 차분하게 바뀌어 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을 내놓았죠.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중세부터 내려오는 폴란드 민속음악과 자신의 영감을 결합해 만든 독특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주로 합창 음악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구약성경 시편에서 가사를 가져온 '베아투스 비르(Beatus Vir)' 작품 번호 38(1979), 무반주 합창을 위한 '미제레레' 작품 번호 44(1981) 등이 대표적입니다.
결정적으로 구레츠키를 세계에 알린 작품은 역시 교향곡 3번 작품 번호 36(1976)입니다. '슬픔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이 교향곡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폴란드인에 대한 추모와 위로가 담겨 있어요. 모두 세 악장으로 구성된 이 교향곡은 오케스트라와 소프라노가 함께 연주합니다. 1악장은 폴란드에서 15세기부터 내려오는 예수를 향한 마리아의 슬픈 기도를 담았으며, 2악장은 게슈타포 감옥에 갇힌 18세 소녀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소재로 삼았죠. 3악장은 독일군에게 희생된 아들을 찾는 어머니가 부르는 민요를 바탕으로 합니다.
1977년 4월 초연이 이뤄졌지만, 비극적 내용과 이에 걸맞은 슬픈 멜로디, 장송곡풍 분위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작품이 주목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1992년 소프라노 돈 업쇼, 데이비드 진먼 지휘로 런던 신포니에타가 녹음한 교향곡 3번이 발매됐는데, 이 음반은 무려 100만장 이상 팔렸어요. 이 교향곡은 20세기에 만들어진 클래식 작품 가운데 가장 히트한 작품 중 하나가 됐습니다.
소련에서 연주 금지됐던 곡 '크레도'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1935~)는 생존 작곡가 가운데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에스토니아 파이데에서 태어나 10대 초반부터 작곡을 시작한 패르트는 탈린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영화음악의 음향감독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초기 작품들에서는 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의 영향이 나타나지만, 그 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음악을 연구해 1970년대 후반부터 자신만의 작곡 스타일을 정립합니다. 그가 창시한 기법은 '틴틴나불리(Tintinnabuli)'로 '작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법의 작품들에서는 단순한 화음과 반복되는 멜로디, 종소리처럼 신비스럽게 들리는 음향 등 특징이 나타나요. 틴틴나불리가 사용된 그의 대표작으로 '프라트레스'('형제들'이라는 뜻·1977), '타불라 라사'(비어 있는 석판·1977), '거울 속의 거울'(1978) 등이 있습니다.
틴틴나불리 기법이 사용되기 전 작품인 '크레도'(1968)는 피아노,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입니다. 소련 체제하에 있던 에스토니아 밖까지 패르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죠. 당시 체코를 침공한 소련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알려졌고, 그 진위와 상관없이 소련에서 오랫동안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삶과 죽음 가르는 '스틱스 강'도 소재
조지아 트빌리시 출신 기야 칸첼리(1935~2019)는 서정적이고 차분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영화음악 작곡가로 경력을 시작한 칸첼리는 영화 50여 편의 음악을 작곡했고, 합창 음악과 실내악 등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진지한 사색과 침묵, 비극적 정서와 긴 호흡으로 흘러가는 멜로디 등이 특징이죠. 1991년부터 독일과 벨기에 등지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칸첼리의 음악에서는 애잔한 향수와 그리움도 느껴집니다.
칸첼리의 음악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를 비롯해 우리 시대 최고 연주자들이 즐겨 연주해요. 그의 작품 '스틱스'(1999)는 비올리스트 유리 바시메트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 스틱스는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의 세계로 넘어갈 때 건너야 하는 강이죠. 칸첼리는 평소 친밀했던 동료 작곡가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진혼곡 형식으로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주인공 비올라의 목소리가 강물로 갈라진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모을 수 있고, 그 풍성한 음향의 표현력으로 갈라진 영혼들을 화해와 조화로 이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올라와 합창, 오케스트라가 약 35분간 연주하는 대곡 '스틱스'는 울음과 탄식, 위로를 오가는 다양한 감정을 솔직하고 강렬하게 묘사합니다.
구레츠키·패르트·칸첼리의 작품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대인의 마음을 차분히 매만져주는 역할을 합니다.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20세기 작품도 이들의 음악을 통해 친숙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 1968년 8월 체코 프라하를 침공한 소련군. /브리태니커
- ▲ 르네상스 시기 화가 요아힘 파티니르가 그린 ‘스틱스 강을 건너는 뱃사공 카론’. /위키피디아
- ▲ 헨리크 구레츠키, 아르보 패르트, 기야 칸첼리.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