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집시 문화 번성… 플라멩코 춤이 불처럼 타올라요

입력 : 2023.09.18 03:30

'카르멘'으로 보는 스페인 문화

다음 달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연극 '카르멘' 공연 장면. /서울시극단
다음 달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연극 '카르멘' 공연 장면. /서울시극단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입니다. 베르디의 '아이다(Aida)',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 그리고 '카르멘'의 맨 앞 알파벳을 따 '오페라 ABC'라 부를 정도죠. 모두 오페라의 기본이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카르멘'이 오페라를 비롯해 연극과 뮤지컬, 영화 등으로 수없이 변주되면서 오랫동안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것은 바로 매력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 때문입니다. 집시 문화가 꽃핀 스페인 안달루시아를 배경으로 붉은 드레스를 입고 플라멩코를 추는 카르멘의 정열적인 이미지는 1875년 오페라 초연 이후 불멸의 명성을 얻었어요. 오늘은 연극으로 각색돼 좀 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으로 해석된 새로운 '카르멘'(8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을 만나봐요.

프랑스 작가가 쓴 '카르멘' 원작 소설

오페라 '카르멘'은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1803~1870)가 1845년 쓴 동명 소설이 원작이에요. 메리메는 변호사이자, 극작가, 역사가, 고고학자 등 다양한 일을 했어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그야말로 '르네상스 맨'이었죠. 4장으로 구성된 소설 '카르멘'은 메리메가 스페인을 두 차례 여행하고 탐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에요. 그래서 스페인 문화를 이해하고 나면 '카르멘'을 더욱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답니다.

메리메의 소설은 독특한 구성이 돋보여요. 보통 소설 주인공이 화자가 되는 것과 달리, 한 고고학자가 스페인 답사 중 우연히 탈영병 출신 돈 호세를 만나 들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는 방식이죠. 정열적인 집시 여성 카르멘을 보고 첫눈에 반한 돈 호세는 상관을 죽이고 탈영까지 감행합니다. 하지만 투우사 루카스와 사랑에 빠진 카르멘은 돈 호세를 떠나려 하고, 돈 호세는 결국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메리메의 원작은 당시 유명 오페라 대본 작가였던 앙리 메이야크와 뤼보비크 알레비의 손에서 상당 부분 각색됐습니다. 작곡가 비제가 원작 소설과 각색한 대본이 너무 다르다고 불평할 정도였어요. 이는 당시 보수적인 관객층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해요. 카르멘에게 집착하는 돈 호세의 잔인함과 카르멘의 자유분방함을 훨씬 순화했죠. 무엇보다 원작에 없는 돈 호세의 정숙한 약혼녀 미카엘라가 오페라에 등장해요. 미카엘라와 돈 호세, 그리고 카르멘의 삼각관계를 만들어 긴장감을 더합니다.

카르멘이 돈 호세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 장면은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논란거리예요. 초연 당시 극장장은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게 카르멘과 투우사가 결혼하는 해피 엔딩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비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개막을 앞두고 사임해 버리죠. 오페라 '카르멘' 초연 무대에 대한 대중과 평단 반응은 싸늘했어요. 당시 사회 관념상 카르멘 같은 여성 주인공은 낯설기만 했죠. 특히나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방인이었던 집시 문화도 생소함을 더했어요.

집시와 플라멩코, 그리고 투우

집시(Gypsy) 민족은 대략 9세기쯤 인도 북서쪽에서 출발한 소수 유랑민으로 알려져 있어요.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갔는데, 특히 스페인 안달루시아는 집시의 도시로 유명했죠. 1425년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5세는 집시에게 통행증을 발행해 스페인 산티아고 길 순례를 허가했어요.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집시를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고 마을에 머물게 했죠. 안달루시아에선 스페인 집시 민족 70만명 중 절반인 35만명이 거주할 정도로 집시 문화가 번성했어요. 이런 배경에서 안달루시아 집시 문화만의 특별한 춤 '플라멩코'가 탄생했습니다.

춤과 노래, 그리고 기타 세 부분으로 구성된 민속 예술 플라멩코는 안달루시아의 이슬람 문화와 집시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예술로 사랑받았어요. 19세기 중반 이후 '카페 칸탄테(cafe cantante)'라고 불리는 음악 카페에서 플라멩코 공연이 열리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플라멩코는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아픔을 가장 깊이 있게 표현하는 음악과 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카르멘'의 배경이 되는 또 다른 스페인 문화는 바로 투우입니다. 카르멘의 새로운 사랑 루카스는 스페인 유명 투우사로 등장해요. 소와 인간의 싸움인 투우는 17세기쯤 스페인 궁정 귀족의 오락거리였어요. 19세기엔 일반 군중도 즐기게 되면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국가 경기가 됐죠. 한 경기 시간은 보통 20분 정도고, 마지막 순간 투우사 마타도르(matador)가 소를 흥분시키기 위해 새빨간 천인 무레타(muleta)를 흔들어요. 투우사의 몸과 소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느냐에 따라 경기 우열을 점치죠. 프랑스 남부 지역과 스페인 북동부 지역 카탈루냐는 한때 동물 학대를 이유로 투우를 금지하기도 했지만, 위법이 아니라는 판결로 지금은 다시 투우 경기를 하고 있어요.

고전은 언제나 동시대 관객에게 다시 해석되면서 생명력을 갖습니다. 고선웅 연출이 각색한 '카르멘'은 더욱 주체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으로 무대에 오르죠. 원형 무대 위 투우 경기를 떠오르게 하는 카르멘과 돈 호세의 치명적인 사랑, 여기에 플라멩코 춤과 기타 선율이 더해지는 '카르멘'으로 이국적인 스페인 문화를 느껴볼까요.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