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파란 피… 독소 닿으면 젤리처럼 굳어 신약 테스트에 써요

입력 : 2023.09.12 03:30

투구게

/그래픽=유재일
/그래픽=유재일
고생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모습으로 살아온 동물이 있습니다. 해저면을 기어다니며 사는 절지동물, 투구게입니다. 둥근 몸체에 긴 꼬리, 딱딱한 껍데기가 있고 배에 다리가 달렸어요. 둥근 몸체가 말발굽을 닮아 말발굽게(horseshoe crab)라고도 부르죠.

투구게가 처음 등장한 것은 약 4억400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 지층에서 투구게 화석이 발견됐죠. 고생대 두 번째 시기인 오르도비스기(약 4억5800만~4억4400만 년 전)로 삼엽충과 필석이 나오던 시기입니다.

이후 지구는 극단적인 환경 변화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생물계는 크고 작은 멸종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투구게는 아니었죠. 환경 변화에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투구게는 지금도 여러 바다에서 발견됩니다. 미국 대서양 연안이나 멕시코 남동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에서도 발견되죠.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제주도 우도에서 한 번 채집됐습니다.

투구게는 해저면을 기어다니며 작은 생물을 잡아먹고 살지만 산란기 때는 육지로 올라옵니다. 암컷은 한 번에 알을 6만~12만 개 낳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알은 바닷새들에게 중요한 먹잇감이죠.

투구게 피, 신약 독성 파악에 핵심

우리는 왜 투구게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투구게 혈액이 신약의 독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새로 만든 치료제나 백신은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세균에 쉽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중 대장균이나 살모넬라균은 세포벽에 있는 내독소(endotoxin)가 사람 세포와 반응해 염증을 만들고 발열을 일으킵니다. 이 내독소가 있는지 빠르게 확인하는 방법이 투구게 피에서 추출한 'LAL(Limulus Amebocyte Lysate) 단백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LAL 단백질은 내독소를 만나면 젤리나 묵처럼 굳어지는 성질이 있거든요.

1963년 투구게에서 이 단백질을 발견하기 전에는 토끼를 내독소 반응 실험에 썼습니다. 체중 1.5㎏ 넘는 토끼 귀 정맥에 용액을 1㎏당 10㎖ 주입하고, 체온계를 60~90㎜ 깊이로 항문에 삽입해 열이 나는지 확인했죠. 방법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실험 토끼들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LAL 단백질을 사용하는 실험은 토끼 실험보다 비용이 저렴하고, 소요 시간도 3시간 이상에서 1시간 이내로 줄었습니다. 특히 민감도가 아주 높아요. 수영장에 소금 알갱이 하나가 떨어진 정도의 내독소에도 반응할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생물에서는 이 물질을 얻을 수 없을까요? 혈액은 몸 곳곳을 돌아다니며 면역 세포나 물질을 옮깁니다. 몸에 해로운 물질(항원)이 들어오면 면역 세포가 항체를 만들어 항원을 없애 버립니다. 하지만 투구게는 굳이 면역 세포가 항체를 만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요. 혈액 속 LAL 단백질이 해로운 물질을 인식하면 그대로 피를 굳혀 더 퍼지지 못하게 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죠. 오랜 세월을 살아온 투구게는 피도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LAL 단백질이 남아 있는 겁니다.

수억 년간 대멸종도 버텼지만

미국에서는 매년 투구게를 약 40만 마리 포획해 피를 채취합니다. 코로나 확산으로 백신 수요가 늘자 이 숫자는 2021년 72만 마리까지 늘었죠. 전 세계적으론 더 많을 거예요. 투구게 전체 개체 수가 줄어들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2016년 투구게를 위기 근접종으로 지정했어요.

투구게 채혈 과정은 이렇습니다. 야생에서 투구게를 포획한 뒤 심장 가까운 딱지에 구멍을 뚫습니다. 전체 피의 30%를 채취한 뒤 투구게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많게는 절반 정도가 죽는다는 점입니다. 투구게를 바다로 돌려보내도 손상을 입고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라 생존 확률이 떨어집니다.

채혈할 때 암컷을 선호한다는 것도 개체 수 감소 이유 중 하나예요. 투구게 피 1L를 채혈하려면 수컷은 244마리, 암컷은 96마리가 필요합니다. 암컷이 덩치가 더 크기 때문이죠. 같은 공정이라면 암컷에게서 채혈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런데 피를 뽑힌 암컷은 번식력이 약해져 알을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아요.

투구게 개체 수 감소는 다른 동물에게도 위기입니다. 예를 들어 바닷새 중 하나인 붉은가슴도요는 투구게 알이 중요한 먹잇감인데, 먹을 게 부족해지죠. 수억 년 동안 급격하게 변한 지구 환경보다 인간이 더 위협적인 겁니다.

다행히 투구게를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유전자 재조합을 이용해 만든 대체 시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있죠. 우리나라는 지난 3월 LAL 단백질 외에 유전자 재조합 시약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대한민국약전(KP) 개정안'을 행정예고했습니다. '약전'은 의약품 제조 방법과 성능, 품질, 사용법을 담은 사전이에요. 유럽 약전은 2019년 대체 시약 사용을 승인했어요. 지난달 22일에는 미국 약전(USP)이 합성 대체물 사용에 관한 지침 초안을 발표했습니다. 내년 1월 전 최종 확정할 예정이죠. 의약학 선진국 미국이 나선 덕에 투구게 보호가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투구게 혈액은 왜 파란색일까?]

투구게 혈액은 파란색을 띱니다. 일반적인 동물이 산소를 운반할 때 헤모글로빈(철 성분)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투구게는 헤모시아닌(구리 성분)을 이용하기 때문이죠. 구리는 산소와 만나면 푸른색을 띠어요. 헤모시아닌은 헤모글로빈에 비해 산소 전달 능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낮은 온도에서 점도가 높아지는 헤모글로빈과 달리 상태 변화가 없어 극한 환경에 살아남기 유리해요. 투구게 외에 거미, 전갈 등 협각류(鋏角類)와 그 친척들도 피가 파랗습니다.
오가희 어린이조선일보 편집장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