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옛날 옛적…' 모두가 아는 뻔한 동화… 주인공 입장에서 다르게 생각해 봐요

입력 : 2023.08.24 03:30

빨간 모자가 화났어!

[재밌다, 이 책!] '옛날 옛적…' 모두가 아는 뻔한 동화… 주인공 입장에서 다르게 생각해 봐요
필립 잘베르 지음 | 김시아 옮김 | 출판사 올리 | 가격 1만4000원

'옛날 옛적, 먼 왕국에 높은 탑이 수없이 많은 성이 있었어요. 성에는 아이를 낳지 못해 너무너무 슬퍼하는 왕과 왕비가 살았어요.'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네요. 왠지 뻔한 내용일 것 같아요. '왕 부부는 아이를 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 마술사, 마녀들을 만나 상담도 받았어요.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이야기가 조금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요.

그런데 그다음 페이지엔 "그만!"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어요. 뭘 그만하라는 걸까요? 책장을 넘기면, 주인공 왕 부부가 등장해요. 왕비는 이렇게 말해요. "그만해, 작가 양반! 뭐라고 할지 다 알아. 온갖 걸 다 해 보고, 결국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쓰겠지. 내가 아이를 가질 거고 마침내 딸을 낳을 거야. 그러면 요정들이 와서 요람에 대고 이러쿵저러쿵할 테지!" 동화 속 왕비도 뻔한 이야기에 질렸나 봐요. 화가 잔뜩 난 왕비는 작가를 향해 이렇게 말해요. "왕과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대신 우리는 고양이를 좋아해." 이렇게 말한 왕비는 이제 자신들은 나갈 테니, 뒷이야기는 '작가 양반'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하네요.

작가는 이야기를 다시 써요. 높은 탑이 많은 성은 그대로 두고, 그 안에 사는 주인공만 슬쩍 바꾸려 해요. "남자는 수염 때문에 못생기고 끔찍하게 보였어요. 그래서 여자들이…." 작가가 이번에는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 이야기를 쓰려나 봐요. 그는 아내들을 죽인 나쁜 인물이었죠. 그런데 이번에도 성 안에서 "그만!" 하는 소리가 울려 퍼져요. 푸른 수염은 작가에게 항의해요. 이렇게 멋진 수염을 가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아느냐며, 만약 이야기가 바뀌지 않으면 수염을 몽땅 깎아버리겠다고 하네요.

작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해요. 그런데 새 이야기에 등장한 마녀도, 뒤를 이어 늑대도, 아기 돼지들도, 빨간 망토도, 모두 뻔한 이야기에 화가 난다며 이야기가 바뀌지 않으면 더 이상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겠다고 하네요. 급기야 동화 속 주인공이 모두 모여 시위까지 합니다. 그러자 작가는 동화 속 주인공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해요. 그러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옛날 옛적, 먼 왕국에 높은 탑이 수없이 많은 성이 있었어요. 모든 게 깔끔하고, 멋지고, 호화스럽고, 고요하고, 즐거웠어요.' 일반적인 동화에서 볼 수 없던 전개예요. 이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책장을 넘기자 마지막 페이지예요. '그건 이야기가 없는 성이었죠. 그게 다예요. 끝.' 잔뜩 긴장하고 읽었는데 작가가 쓴 결말이 너무 허무해 오히려 웃음이 터지네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과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재미있게 알려주는 그림책입니다.

김성신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