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한국 첫 여성 비행사… "일왕 궁성 날아가 폭탄 투하할 것"

입력 : 2023.08.24 03:30

권기옥

권기옥(오른쪽) 생전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권기옥(오른쪽) 생전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서울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지난 20일까지 '안녕, 꼬드롱!'이란 제목의 전시가 열렸어요. '꼬드롱'이란 프랑스의 코드롱 형제가 1913년 개발한 항공기 '코드롱 G.3'을 말해요. 엔진 하나와 두 날개를 가진 단발 복엽기(複葉機·동체의 아래위로 앞날개가 둘 있는 비행기)로, 최고 시속이 112㎞나 됐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정찰기와 훈련기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 '코드롱'을 복원한 날개 길이 13.3m의 비행기도 전시에서 볼 수 있었죠. 그리고 이 비행기를 훈련용으로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1901~1988)입니다.

하늘을 날고 싶어 하던 조선 소녀

"이야, 저것 좀 올려다봐." "으악! 땅으로 추락하는 거 아니에요?"

1917년 5월 평양에서 많은 사람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비행기는 하늘을 이리저리 예측할 수 없게 날아다니는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어요.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 비행사가 시범 비행을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걸 지켜보는 군중 속에 16세 소녀 권기옥도 있었죠.

"아, 나도 비행사가 돼서 저렇게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 보고 싶다!" 누군가 옆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혀를 끌끌 찼을 거예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여자애가 시집 잘 가서 애나 낳으면 그만이지' 하는 것이 당시 많은 한국인의 인식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남성 비행사도 한 사람 없는 조선 땅에서 여자가 비행사가 되겠다니요.

권기옥만 해도 큰딸에 이어 둘째 딸로 태어나 어릴 적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서 가라'는 뜻의 '갈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해요. 원래 부잣집이었으나 노름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했고, 남의 집 문간방에 사는 형편이라 권기옥은 열 살 때 공장에 나가 일해야 했어요. 1년 뒤 가까스로 교회에서 운영하는 소학교를 다닌 뒤 숭의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죠.

비행사 되기 위해 중국 윈난으로 건너가


1919년 졸업반이던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의 권유로 '송죽회'란 단체에 들어갔어요. 여성들로 이뤄진 송죽회는 독립운동을 펼치던 비밀 조직이었습니다. 그해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조선 여학생처럼 권기옥도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가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십시일반 모금한 뒤 중국 상하이에 막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가 하면, 국내에 잠입한 독립단원이 폭탄을 제조할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권기옥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어요. 일본인 형사가 검찰에 보내는 심문 조서에 "지독해서 말을 듣지 않으니 검찰에서 단단히 다뤄 달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 나온 뒤에도 권기옥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경찰에 쫓기게 됐습니다. 마침내 1920년 9월 멸치잡이 배에 숨고는 서해를 건너 상하이로 탈출했습니다. 중국 난징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홍도여자중학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한 뒤 1923년 졸업했어요.

권기옥의 다음 행로는 무엇이었을까요? 군관 양성을 추진하던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중국 남부 윈난(雲南)에 있는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임정 요인이었던 도산 안창호는 비행기가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여겼고, 권기옥에게 힘이 돼줬다고 해요.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것과 '조국 독립을 이루겠다'는 두 가지 꿈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었죠. 당시 권기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비행사가 돼 일본 도쿄에 있는 일왕 궁성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습니다!"

대륙에서 하늘을 날며 독립운동 펼친 여성

권기옥은 낯설고 먼 윈난에서 힘든 비행사 교육과 훈련을 견뎠습니다. 그곳엔 중국이 프랑스에서 구입한 비행기 20대가 있었고, 초빙받은 프랑스 교관 2명이 훈련을 맡았죠. 이때 권기옥이 처음 타본 훈련기가 바로 앞서 나온 '코드롱 G.3'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가 권기옥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에 새벽에만 훈련해야 했고 학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1925년 2월, 권기옥은 마침내 윈난육군항공학교의 제1기 졸업생이 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비행사가 탄생한 것이죠.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공군을 조직할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 정부 공군으로 활약하며 일제와 맞섰습니다. 그는 모두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한 뒤 임시정부 산하 한국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하며 계속 독립운동에 매진했습니다. 한국광복군 비행대를 만들 구상도 했고 미군과 협력해 직접 대일 전투에 나설 계획도 세웠어요.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초창기 공군 확립에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76세 때인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권기옥은 여성이 차별과 순종을 강요받던 시대에 그 벽을 깨고 비행사로서 조국 독립에 투신한 선각자였습니다.


[한국인 최초 비행사는?]

한국인 최초 비행사는 1920년 2월 미국에서 비행 훈련을 마친 한장호·이용선·이초·오림하·장병훈·이용근 등 6명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이 미국 캘리포니아에 세운 한인 전투 비행사 양성 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인물은 1920년 11월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12월 서울 여의도 상공을 난 안창남(1901~ 1930)이었습니다. '한국의 하늘을 처음으로 난 한국인 비행사'라 할 수 있겠죠. 안창남 역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비행 훈련 중 추락해 29세에 숨졌습니다.
권기옥의 윈난항공학교 졸업장. /국가기록원
권기옥의 윈난항공학교 졸업장. /국가기록원
권기옥이 '코드롱 G.3'에 탑승한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권기옥이 '코드롱 G.3'에 탑승한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됐던 '코드롱 G.3' 복원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됐던 '코드롱 G.3' 복원 모습. /국립항공박물관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