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일제가 신문 폐간하자 "한강도 흐느끼느니" 외쳤죠
입력 : 2023.08.10 03:30
만해 한용운
- ▲ 서울 성북구에 있는 한용운 선생의 집 ‘심우장’. /문화재청
올해 초 만해가 쓴 '님의 침묵' 초판본이 경매에서 1억5100만원에 낙찰돼 한국 현대문학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시 '님의 침묵'을 쓴 만해는 문학사에서도 굵직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왜 슬프단 말이냐
1919년 3월 1일, 일제 치하에서 고난을 겪고 있던 우리 민족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 운동을 펼쳤어요. 운동의 중심 인물인 민족 대표 33인은 감옥에 갇혔는데 '주모자를 모두 극형에 처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옥중의 일부 인사들이 통곡하자, 줄곧 의연한 태도로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울기는 왜 울어?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다는 말이냐!" 33인 중 불교를 대표했던 강직한 성품의 인물, 바로 만해 한용운이었습니다.
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했는데, 15세 때인 1894년 갑오경장과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격변기를 맞았습니다. 2년 뒤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간 뒤 출가해 승려가 됐습니다. 그는 넓은 세상에 관심이 많아 만주와 연해주를 돌며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만났다고 합니다. 이후 '불교대전'을 간행하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며 불교 혁신과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1918년엔 불교 잡지 월간 '유심'을 냈습니다.
3·1 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된 만해는 3년 동안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압박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남으로부터) 받을 생각이 없다." "4000년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인가." 형무소에서 나올 때 마중 나온 사람들에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인사를 할 줄만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모르느냐?" 당신들 모두 독립운동가를 환영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마땅히 스스로 독립운동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
출소한 만해는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강연과 저술을 통해 조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1926년, 우리나라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표했습니다. 88편의 시가 들어 있는 이 시집 중 대표작인 '님의 침묵' 시작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선 다시 이렇게 다짐합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시에서 '님'(현재 표기로는 '임')은 조국, 절대자, 불교의 깨달음, 사랑하는 연인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대체로 임을 상실한 비극적 현실의 아픔을 기다림과 희망의 사상으로 극복하는 내용이라고 평가됩니다. 독립을 향한 신념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했다는 것이죠.
총독부가 준 돈을 전달하러 온 청년의 뺨을 때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대쪽 같은 독립운동가였던 만해가, 한편으로는 이토록 섬세한 시어(詩語)를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만해가 붓만 잡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손을 잡은 최대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가 출범하면서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 자리를 맡았습니다. 불교 계통 항일운동 단체인 '만당'을 지도하기도 했죠.
쓸쓸한지고, 한강물도 흐느끼나니
만해의 집은 서울 성북동 뒷산 자락에 있었는데, '잃어버린 나의 본성을 찾자'는 불교적 뜻이 담긴 '심우장(尋牛莊)'이란 현판을 걸었습니다. 다른 집처럼 남향으로 지으면 보고 싶지 않은 총독부 건물이 보일 것이라는 만해의 뜻에 따라 북향으로 지어졌다는 얘기도 전합니다.
1937년 독립운동의 거물 일송 김동삼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만해는 그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총독부가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 하자 만해는 "숨이 떨어졌는데 저대로 내버려둔 것인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이 무렵 만해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 조선일보 사장인 계초 방응모였습니다. 만해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보고 자금을 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심우장을 지었고, 김동삼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1935~1936년 만해는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했습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지만 사실은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독립 투쟁 의지를 고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939년부터는 같은 신문에 '삼국지'를 번역, 연재했습니다.
1940년 8월 총독부가 조선일보를 강제로 폐간하자, 만해는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 속에 그 비통함을 담았습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키도 쓸쓸한지고/ 망국의 서울의 가을날/ 한강의 물도 흐느끼느니….'
엄혹한 일제 말기에도 만해는 창씨개명과 조선인 학병 동원 반대에 나서며 항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1944년 6월 29일, 만해는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별세했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때였습니다. 유해는 망우리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1962년 만해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고인에게 훈장 등을 주는 것)됐습니다.
- ▲ 만해 한용운. /국사편찬위원회
- ▲ 시집 ‘님의 침묵’ 초판본. /코베이옥션
- ▲ 1927년 한용운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 정면과 측면 모습을 촬영하고 주요 정보를 기록한 카드. 사진을 본 사람들은‘감옥에서도 눈빛이 활활 불타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해요.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