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임란 이후 커진 불교… 높이 22.7m 팔상전도 지었죠
입력 : 2023.07.27 03:30
조선 후기 불교 건축
- ▲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 /문화재청
금산사는 후백제 왕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아들 신검에게 감금됐던 장소로 유명하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때 건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미륵전은 조선 후기인 1635년(인조 13년) 세워진 건물입니다.
이 무렵인 17~18세기 우리나라 각지에서 대규모 불교 건물이 잇따라 건립됐습니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뿐 아니라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 충남 부여 무량사 극락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이에요. 이 네 건물을 조선 후기 '4대 중층(重層·여러 층) 불전(佛殿·부처를 모신 집)'이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일어난 불교
얼마 전 한 외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불교 신자가 많이 있는 국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와 보니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정작 수도 한복판에는 큰 절이 드물더라고요.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392년 창건된 조선 왕조는 이전 나라들과 달리 유교만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고 불교는 억압하는(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한양 도성에는 큰 절이 거의 없는 반면 지방, 특히 깊은 산 속에서 큰 절이 번성하게 됐어요. 이것이 한국 불교의 한 특징이 됐죠. 그래서 한국 산사(山寺)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것입니다."
당시 미처 설명을 못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주로 서울 바깥에서 불교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선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휴정(서산대사)·유정(사명당) 등의 활약에 힘입어 불교에 대한 규제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전란 중 수많은 사람이 허망하게 죽는 것을 본 백성이 '죽음' 문제를 외면한 유교 대신 내세(來世·죽은 뒤의 세상)의 희망을 말하며 현실의 슬픔을 위로하는 불교에 끌리게 됐습니다. 불교가 아래의 지지를 받는 '대중(大衆) 불교' 성격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한국미술사 강의 4'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더는 숭유억불의 나라가 아니었고, 피지배층인 서민들이 불교를 높이 받들게 된 '숭유존불(崇儒尊佛)'이 이뤄지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또다시 불교 미술의 전성기가 나타난 것이죠.
법주사 팔상전과 리샤오룽
조선 후기 불교의 중흥(쇠퇴하던 것이 중간에 다시 일어남)은 사찰 건축에도 반영됐습니다. 유홍준 교수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전국 곳곳에서 대대적인 불사(불가에서 행하는 일)가 일어났다"며 "지금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명찰(이름난 절), 대찰(큰 절)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중건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무렵 사찰 건축은 '전에 없던 건물의 대형화'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2층, 3층, 5층짜리 큰 건물을 잇달아 세웠습니다. 지금 복원하려면 한 채당 대략 200억원 이상 투입될 만한 규모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상당 부분 민초(民草)들의 시주로 이뤄졌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먼저 지어진 것은 높이 22.7m에 이르는 충북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쌓아 나라에서 벼슬을 받은 각성 스님 주도로 1620년대 인조 임금 초기 중건됐죠.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목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5층 구조로 시각적으로 장대하고, 1층부터 5층까지 5칸, 3칸, 2칸으로 줄어들어 상승감과 안정감이 돋보입니다.
훗날 팔상전의 장대한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은 사람이 홍콩의 유명 무술 배우 리샤오룽(李小龍·1940~1973)입니다. 그는 1972년 영화 '사망유희'의 주요 배경을 이곳으로 정한 뒤, 그 유명한 노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격투 장면을 스튜디오에서 먼저 촬영했습니다(실제 팔상전 구조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한국 현지 촬영을 하지 못한 채 갑자기 사망했고, 나중에 완성된 영화는 아쉽게도 설정을 바꿨다고 합니다.
숙종 임금이 새 이름 내린 각황전
다음으로 지어진 것이 이번 호우로 피해가 발생한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국보)입니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35년 재건한 뒤 네 차례에 걸쳐 중수(건축물의 낡은 것을 손질해 고침)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에서는 아주 드문 3층 법당입니다. 높이 19m로, 웅장한 외관이 돋보이죠.
미륵전 안에 있는 불상은 1935년 불탔고,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라는 평가를 받는 김복진(1901~1940)이 제작한 높이 11m 규모의 미륵삼존상이 봉안됐습니다. 건물 내 불상으로는 세계적인 크기라고 합니다. 김복진은 법주사 팔상전 옆 콘크리트 미륵대불 제작에도 착수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63년 준공됐습니다. 이 불상은 한때 속리산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붕괴 위험 때문에 1988년 철거됐고, 지금은 청동으로 만든 미륵대불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4대 중층 불전'의 세 번째 건물은 17세기 초 건립된 2층 규모 충남 부여 무량사 극락전(보물)입니다. 역시 중후한 규모로 이름 높은 건축물인데, 그 안에는 5m가 넘는 거대한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이 있습니다.
화엄사 각황전(국보)은 삼국시대에 건립된 유서 깊은 사찰 화엄사의 재건과 관련된 건축물입니다. 유명한 불상 장륙존상을 모신 장륙전이 임진왜란 때 불탔고, 1702년(숙종 28년) 이 장륙전의 복원 작업이 마무리됐는데, 숙종 임금이 '각황전' 편액(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을 내렸다고 합니다. 각황전은 웅장하면서도 균형감과 조화미를 간직해 조선시대 대표적 목조 건축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 ▲ 충남 부여 무량사 극락전. /문화재청
- ▲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문화재청
- ▲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조선 후기 ‘4대 중층 불전’이라 불리는 대형 건물들로, 불교의 중흥을 상징합니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