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로마·피렌체·베네치아 풍경, 사진처럼 그렸어요
입력 : 2023.07.10 03:30
'여행'을 주제로 한 그림
- ▲ 카날레토, ‘베네치아 대운하로 향하는 입구’, 캔버스에 유채, 1730년쯤. /미 휴스턴미술관
그랜드 투어와 베두타 그림
17세기 말부터 영국 귀족 계급과 지식인 계층은 견학 목적으로 청소년 자녀에게 개인 교사를 붙여 이탈리아로 보냈어요. 이를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불러요. 이탈리아는 풍부한 고대 유산과 지중해를 낀 따사로운 자연환경 덕에 그랜드 투어 목적지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린 도시는 로마였고, 그다음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인기를 끌었어요. 18세기 들어 그랜드 투어는 영국뿐 아니라 북부 다른 나라에서도 '체험을 통한 학습' 차원에서 장려됐어요. 인문학 공부나 독서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상류층 교육과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랜드 투어에 따라간 개인 교사는 지금의 답사 인솔자처럼 체계적이지는 못했어요. 부모의 당부대로 학생들의 행동거지를 어떻게든 통제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죠. 개인 교사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고 자유롭게 해준 뒤, 자신의 집필 활동에 몰두하곤 했습니다. 애덤 스미스 등 우리가 아는 여러 인물이 그랜드 투어의 인솔 교사였다죠.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면, 교사도 학생도 이탈리아에서 느낀 햇살과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기념품 구입에 열을 올렸습니다. 아예 화가에게 여행 기념용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어요. 친구나 가족에게 다녀온 곳에 대해 설명하려면 여행지를 사실 그대로 묘사한 그림이어야 했지요. 어떤 그림인지 살펴볼까요?
〈작품1〉은 이탈리아 화가 카날레토(1697 ~1768)가 그린 베네치아의 풍경입니다. 베네치아 여행자를 위해 그린 것이죠. 이 그림처럼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경(全景)을 하나의 화폭에 넣은 사실적인 풍경화를 베두타(veduta·'전망'이라는 뜻) 그림이라고 불러요.
사진기의 조상, 카메라 오브스쿠라
베두타 그림의 선구적 화가로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를 들 수 있습니다. 〈작품2〉는 페르메이르가 그린 '델프트 풍경'이에요. 이 시기 풍경화가 중에는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시각 기구를 활용한 사람도 있었어요. 확실한 증거는 남아있지 않지만, 페르메이르도 카메라 오브스쿠라(camera obscura ·'암실'이라는 뜻)라는 기구를 사용했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는 상자 속에 비친 상이 거울을 통해 판에 나타나도록 한 장치로, 오늘날 카메라의 조상이에요. 이 기구는 17세기 중반 발명됐는데, 카메라처럼 이미지가 자동으로 찍혀 나오는 기계가 아니라, 작은 구멍으로 빛이 통과하는 상자예요. 빛이 상자 속 거울에 반사되면 스크린에 흐릿하게 상이 새겨지는데, 화가들은 그 맺힌 상을 본떠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는 커다란 도시의 이미지를 축소해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베두타 화가에게 특히 도움이 됐어요.
사진이 없던 시절, 기념품용 그림을 원했던 관광객들은 화가의 개성이 넘치는 표현보다는 사진처럼 실제와 똑같은 그림을 선호했어요. 그리고 모두가 비슷한 그림을 주문했기 때문에 베두타 화가들은 같은 구도의 그림을 여러 점 그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여행객의 주문이 한꺼번에 밀리는 경우도 많아서, 빠르게 제작하는 재능도 베두타 화가에게는 필수였어요. 18세기 베네치아 여행자들 사이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리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카날레토도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적극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세기 베두타 그림은 대표적인 유적지와 고대 건축물의 잔해를 중심으로 풍경을 묘사한 것이 다수예요.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예 도시의 광장을 입체 모형으로 만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1691~1765)가 그린 〈작품3〉을 보세요. 로마 여러 곳에 띄엄띄엄 퍼져 있는 기념비와 건축물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요. 여행지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 중에는 이렇듯 그림 한 장에 많은 유적지가 한꺼번에 들어가도록 요구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추억만 알짜로 담아가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현지 화가들은 되도록 여행자가 원하는 대로 맞춰줬는데, 그러다 보면 그럴 듯하게 진짜 같은 허위 풍경이 탄생하기도 했어요. 마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처럼 진짜와 상상을 적절하게 섞는 기법을 미술에선 카프리치오(capriccio·'변덕'이라는 뜻. 음악용어로 주로 쓰임)라고 해요.
풍경을 무조건 정확하게만 그린다거나, 고객이 의뢰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그리는 것은 화가들 사이에서는 그리 영예롭지 못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미술의 본질은 화가의 정신과 상상력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18세기 그랜드 투어 시대 이탈리아에서는 평생 똑같은 여행지 그림만 그리며 돈을 번 화가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도 많았습니다. 카날레토도 말년에는 창의력이 돋보이는 역작을 완성하고자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고 합니다.
-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델프트 풍경’, 캔버스에 유채, 1660년쯤.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미술관
- ▲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 ‘고대 로마의 판테온과 다른 기념물이 있는 환상의 경치’, 캔버스에 유채, 1737. /미 휴스턴미술관
- ▲ 카메라 오브스쿠라.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