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이스라엘·아랍 충돌 때, 美 키신저가 '왕복'하며 중재했죠
입력 : 2023.06.07 03:30
셔틀 외교
- ▲ 제4차 중동전쟁이 발생한 1973년 10월 수에즈운하를 건너는 이집트 군. /위키피디아
'셔틀(shuttle)'은 '왕복'이라는 뜻으로, 원래 셔틀 외교는 분쟁이나 갈등 당사자 사이를 제삼자가 중재하는 중재 외교를 의미해요. 1970년대 초·중반 아랍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이집트·시리아·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랍권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두고 갈등
유대인들은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중동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해 살다가, 로마 제국 시기 쫓겨났어요. 그 후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온갖 멸시와 탄압 속에서 힘들게 살아야 했죠. 이들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민족주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민족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은 1917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이 민족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미국 내 유대인의 환심을 사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것이었죠.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한 유대인 중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았거든요. 이후 영국은 유대인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고, 희망에 부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떠난 것은 이미 너무 오래전 일이었어요. 유대인이 떠난 자리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아랍인이었습니다. 아랍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강력히 반발했어요. 특히 영국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아랍인이 참전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며 이중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이 점점 격해지자 유엔은 1947년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각자의 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을 채택했어요. 1948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민족 국가인 이스라엘의 건국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죠. 그러자 땅을 빼앗긴 아랍인들과 주변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몰아내기 위해 동맹을 맺고 전쟁을 선포했어요. 그렇게 중동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은 1979년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어요.
키신저에서 비롯된 셔틀 외교
키신저의 셔틀 외교는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 때 시작됐어요.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 전쟁이었죠.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시나이반도 전부와 가자 지구를, 시리아에서 골란 고원을, 요르단에서 요르단강 서안과 예루살렘을 얻어냈어요.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우세한 공군 군사력으로 이집트 수에즈운하 지역과 이집트 내 여러 목표물을 타격했어요. 그러자 소련군과 공군 조종사 등 1만5000명이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됐어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엔 중재로 1970년 휴전했지만, 두 국가 간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1970년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사망하고 안와르 사다트가 새 대통령에 취임했어요. 그는 이스라엘에서 시나이반도를 되찾아 오고 싶어 했죠. 그리하여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유엔의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군을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소련군이 이집트에 주둔하는 한, 그 제안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어요. 그러자 사다트는 1972년 7월 소련군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국내 정치적 문제로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이집트와 시리아는 1973년 10월 이스라엘을 침공했어요.
이스라엘군은 골란 고원에서 후퇴하긴 했지만, 시리아군을 막아냈어요. 이집트군이 시나이반도까지 진격했지만, 이스라엘군의 반격이 시작됐죠. 이스라엘군은 수에즈운하를 넘어 진격하면서 동시에 서안 지구도 점령했어요. 엄밀히 따지면 이미 이스라엘의 승리였지만, 이집트군은 시나이반도 어귀에서 이스라엘군에 격렬히 저항했어요.
이때 당시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가 휴전을 위해 개입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군사적 위협에서 구하고, 동시에 아랍 연합국의 석유 금수 조치(특정 국가에 대해 모든 경제 교류를 중단하는 조치)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런 가운데 최초의 셔틀 외교가 1974년 1월 시작됐어요. 키신저는 우선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일주일 동안 두 국가 사이를 왕복했어요.
이후에는 시리아 문제 해결에 나섭니다. 시리아는 이집트보다 상황이 더욱 복잡했어요. 키신저는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관리들과 시리아 고위 사절단을 따로 만나기도 하고, 이후에는 직접 각 나라를 오가며 협상을 진행했어요. 몇 달에 걸쳐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간 평화 협상이 마무리되는 듯했어요. 그런데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시나이반도를 간절히 되찾고 싶어 했어요. 미국은 다시 한번 개입해 1975년 9월 시나이반도에서 이스라엘군을 더 멀리 철수시키고 이스라엘군을 대신해 유엔 완충지대를 설치하는 것에 합의하도록 했어요.
셔틀 외교를 시작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양자 관계를 개선할 계기를 만들어갔어요.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을 체결해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지위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양국 간 평화 협정이 체결돼요. 하지만 당시 셔틀 외교는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나 나머지 아랍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아 이 지역 갈등의 불씨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답니다.
- ▲ 위 사진은 지난달 7일 윤석열(오른쪽)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후 이동하는 모습. 정상회담을 위한 일본 총리 방한은 2011년 10월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서울 방문이 마지막이었어요. 아래는 2011년 10월 19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에서 이명박(오른쪽)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악수하는 모습. /대통령실
- ▲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에 조인(調印)한 후 악수하는 안와르 사다트(왼쪽)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오른쪽) 이스라엘 총리. 가운데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위키피디아
- ▲ 2010년 방한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