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왜 죽을 각오로 을사늑약 못 막았나' 고종 질타한 선비
입력 : 2023.06.01 03:30
면암 최익현
- ▲ 근대 화가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화.
일본 요구 수용한다면 도끼로 나를 치소서
"전하! 겁이 나서 화친을 청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 주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1876년(고종 13년) 1월, 한 선비가 한양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엎드려 있었어요. 그의 옆에는 도끼 한 자루가 놓여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도끼로 나를 내리쳐 죽이소서'라는 의미를 담은 지부상소(持斧上疏·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옳은 말을 하려는 선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죠.
그가 바로 면암 최익현이었습니다. 조선 침탈을 노리는 일본은 한 해 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고, 이 사건을 핑계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 조선을 개항시켰습니다.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 협상 중이던 시기에 지부상소로 조약과 개항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충북 단양으로 이주한 최익현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 이항로(1792~1868)의 제자였습니다. 이항로와 최익현은 모두 조선 말의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로 분류됩니다. 위정척사란 '옳은 것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19세기 후반 상황에서 성리학과 전통문화를 지키고 천주교와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뜻이죠. 위정척사파는 개화파와 반대되는 정치적 태도를 보였으나,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나라를 위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권력을 질타하고 외세를 경계한 선비
위정척사파가 대단히 보수적인 정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익현은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결정적 국면마다 곧은 말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1868년, 겁도 없이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을 실정(失政)이라고 비판하며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최익현은 이후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는 결정적 계기를 만듭니다. 호조참판 자리에 있던 1873년 올린 이른바 '계유상소'는 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무리한 정책을 비판하며 고종에게 직접 정치에 나설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 상소를 계기로 만 21세의 고종은 친정(親政·임금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봄)을 하게 됩니다.
이후 권력을 잡은 고종과 왕비의 친척인 민씨 세력이 '최익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앞두고 벌인 지부상소는 그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줬습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여기는 주장을 거침없이 설파한 선비였던 것이죠. 최익현의 당시 상소를 보면 세계 정세에 어두운 수구파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돋보입니다.
'일본이 대포를 겨누고 화친을 하자고 하나 믿을 수 없고, 왜인(일본인을 낮춘 표현)이라고 하나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 '우리는 저들에게서 사치품을 사지만 우리는 생필품을 팔아야 하니 백성의 삶에 해를 끼칠 것' '일본인은 우리나라에 와서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라는 상소문 내용은 향후 전개될 비극적 한국 근현대사를 예측이라도 한 듯했습니다.
자신에게 권력을 안겨준 충신의 공로를 잊어버린 것인지, 최익현의 상소에 크게 분노한 고종은 그를 전라도 흑산도에 '위리안치'시켰습니다. 위리안치란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가둬두는 벌이었죠.
관을 벗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
1879년 유배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오랜 기간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1895년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당하고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이 공포되자 그는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섭니다. 고종이 거듭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고, 폐단을 바로잡고 일본을 배척해야 한다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자 최익현은 고종에게 날 선 상소를 올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명나라가 망할 때 의종이 사직을 위해 죽은 의리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의종(숭정제)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서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자금성 뒷산에서 자결했습니다. 최익현은 황제인 고종에게 '왜 죽을 각오로 조약을 막지 못했는가' 하고 질타한 것이죠.
을사늑약 무효 선언과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운동을 펼치던 최익현은 1906년 만 73세에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저명한 유학자인 최익현의 궐기는 전국의 많은 의병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익현은 전북 순창에서 대한제국 관군과 마주치자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선언한 뒤 의관을 정제하고 맹자를 읽던 중 체포됐습니다.
최익현은 그해 8월 대마도로 끌려갔습니다. "관(冠)을 벗으라"는 일본군 말을 듣지 않고 꼿꼿이 버티자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니 일본 법을 거역하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고, 일본 병사가 칼로 그를 찌르려 했습니다. 그러자 최익현은 "이놈, 어서 찔러라!" 하고 꾸짖고는 "나는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했습니다. 기세가 꺾인 일본군 대대장이 "통역이 잘못됐으니 안심하고 식사를 하시라"고 권했고, 단식은 사흘 만에 끝났습니다.
1907년 1월 최익현은 풍토병을 얻어 대마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4개월 동안 밥을 먹지 않아 순국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됐다고 합니다. 그의 애국심과 선비 정신은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귀감이 됐고, 1962년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죽은 사람에게 훈장 등을 줌)됐습니다.
- ▲ 최익현이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대마도로 압송되는 과정을 묘사한 압송도. /청양군
- ▲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면암 고택. /청양군
- ▲ 충남 예산에 있는 면암 최익현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