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법 앞에 모두 평등' 규정한 첫 성문법… 근대 법질서의 기초

입력 : 2023.04.26 03:30

로마법

로마 시대 재판 장소로 쓰이기도 했던 포로 로마노의 현재 모습. /위키피디아
로마 시대 재판 장소로 쓰이기도 했던 포로 로마노의 현재 모습. /위키피디아
4월 25일은 '법의 날'입니다. 1964년 대한변호사협회 주최로 열린 제1회 법의 날 기념식을 시작으로 올해 60주년을 맞았어요. 공정한 법치(法治)가 무엇인지, 그리고 법의 존엄성을 생각해보기 위해 만든 날이죠. 원래 5월 1일이었는데 근로자의 날과 같아 중요한 행사가 겹친다는 지적에 따라 2003년부터 4월 25일로 바뀌었어요. 4월 25일은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법률 '재판소구성법'이 시행된 날짜예요.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고 구성원이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합니다. 역사 속 많은 나라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법체계를 정리했어요. 그중 지금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법이 바로 '로마법'입니다. 아주 오래전에도 시민을 보호하는 법이 있었다는 점과 그 내용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법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어요. 로마법의 원칙은 근대 이후 독일·프랑스 등에서 채택돼 오늘날까지 적용되고 있어요. 우리나라 법도 로마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어떤 과정을 통해 로마법이 정비됐을까요?

처음으로 평민의 권리를 보호한 12표법

로마법의 시작은 '12표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12표법은 기원전 450년쯤 제정된 로마 최초의 성문법(문서 형식으로 일정한 절차를 거쳐 공포된 법)으로, 동판에 새겨 로마 광장에 공포했어요. 12표법은 신분 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성문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기존 로마는 습관이나 관행이 법으로 굳어진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어요. 그렇다 보니 권력을 가진 귀족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을 이용할 때가 많았어요. 평민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로마가 주변 종족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여기에 참전하는 평민들의 힘도 세지고 있었어요. 기원전 494년 평민들은 로마 북쪽 성산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우겠다며 시위를 벌였어요. 귀족들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죠. 이때 귀족과 관리의 전횡으로부터 평민을 보호하는 관리를 뽑기로 했는데, 이 관리가 바로 '호민관'이에요.

기원전 452년 호민관은 당시 의회였던 원로원에 성문화된 법전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귀족과 분쟁이 있을 때 평민들은 어떻게 법적으로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에요. 그때까지 존재하던 법을 정리하고 평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10가지 항목의 법으로 정비했어요. 여기에 2개 항목을 추가해 12표법이라 불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법의 원문은 전해지지 않아요. 기원전 4세기 갈리아 침입 과정에서 12표법을 새긴 동판이 소실됐거든요. 하지만 본문의 3분의 1가량이 후대 저자들의 인용문에 남아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알 수 있어요. 12표법은 법 앞에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구현했다는 의의가 있어요. 거의 모든 조항에서 귀족과 평민,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두지 않았어요. 또 특정 개인에게 특권을 주거나 예외를 적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소송 절차, 판결 집행, 상속, 소유권,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 장례 규정 등 일상생활을 포괄적으로 다뤘습니다. 후에 추가된 두 가지 조항에는 '귀족과 평민의 통혼 금지' '채무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 등 여전히 귀족에게 유리한 내용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2표법은 평민을 보호하는 방향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커요.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12표법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모든 책을 합한 것보다 소중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시민들은 분쟁이 생기면 이 법에 따라 소송을 제기했고, 전문적인 법률 지식을 가진 변호사도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로마 시민에서 모두에게로 확대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는 집정관(정무관 중 최고 관직) 2명 중 1명은 평민 가운데서 뽑도록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어요.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가 평민회(평민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이 원로원 인준 없이도 법적인 효력을 갖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어요. 평민들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 수 있게 된 거죠. 이 법을 포함해 당시 로마에서 시행되던 일련의 법은 로마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시민법'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로마 제국에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 많아졌어요.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시민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각자 자신이 속한 민족이나 지역 법을 적용받았어요. 그런데 상거래 과정에서 로마 시민과 외국인 사이에 분쟁이 많이 일어나 더 큰 차원의 법이 필요하게 됐어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만민법'입니다. 시민법에 비해 만민법은 형식상 요건이 덜 엄격했어요. 예를 들어 시민법과 달리 만민법은 구두계약(증서 없이 말로만 맺은 계약)만 해도 구속력이 발생한다고 보았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만민법도 점차 정교해졌고, 212년에는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면서 로마 시민법과 만민법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로마법이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것은 6세기 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였어요. 그는 기존 법과 역대 황제의 칙령, 로마의 판례 등을 종합해 '로마법 대전'을 만들었어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라고도 불립니다. 로마법 대전은 중세에 잠시 잊혔다가 11~12세기 법학자 이르네리우스가 볼로냐 대학에서 이를 편집해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다시 빛을 봤어요. 특히 이때 독일·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와 로마법을 배웠죠. 덕분에 근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로마법에 근간을 두고 법 체계를 정비했답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높이 들고 또 다른 손에는 법전을 들고 앉아 있어요. /조선DB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저울을 높이 들고 또 다른 손에는 법전을 들고 앉아 있어요. /조선DB
로마 광장에서 12표법을 들여다보는 시민들을 그린 작자 미상의 삽화. /위키피디아
로마 광장에서 12표법을 들여다보는 시민들을 그린 작자 미상의 삽화. /위키피디아
비잔틴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키피디아
비잔틴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위키피디아
1583년 인쇄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위키피디아
1583년 인쇄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위키피디아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