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영화 '호텔 르완다' 실제 주인공, 1268명 살린 영웅이죠
입력 : 2023.04.19 03:30
영화 속 역사 인물
- ▲ 1(왼쪽부터) 2004년 영화 ‘호텔 르완다’ 포스터와 영화의 실존 인물 폴 루세사바기나. 맨 오른쪽은 밀 콜린스 호텔의 현재 모습. /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코리아·페이스북
아이들까지 죽임 당한 르완다 내전
르완다는 1899년부터 독일 식민지였어요. 1차 세계대전 후에는 벨기에 식민지가 돼 45년간 통치를 받다가 1962년 독립했어요. 르완다에는 투치족과 후투족 두 개의 종족이 있는데, 벨기에는 투치족을 통해 후투족을 다스리는 간접 통치 방식을 썼어요. 그래서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유전적으로 우수하다'는 인종주의를 널리 퍼트렸죠. 그런데 이런 통치 방식은 르완다 독립 이후 내전(內戰)의 가장 큰 원인이 됐어요.
독립 직후 집권한 후투 정부는 '투치 제거 정책'을 펴 대규모 학살을 시작했어요. 많은 난민도 생겼죠. 1994년 후투족인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다시 한번 투치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어요. 그 후 투치 정권이 세워지면서 내전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후로도 후투족 반군이 정부와 전투를 지속하는 등 갈등이 계속됐죠. 이 내전으로 약 8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해요.
2004년 개봉한 영화 '호텔 르완다'는 내전이 한창 치열하던 때 상황을 그리고 있어요. 후투족은 대통령 암살을 빌미로 투치족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했어요. 위협을 느낀 주인공 루세사바기나는 투치족 아내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지배인으로 있던 밀 콜린스 호텔로 피신했죠. 이후 그곳으로 피란민 수천 명이 모여들었어요. 루세사바기나는 우여곡절 끝에 투치족과 후투족 난민 1268명의 목숨을 지켰고 이 내용이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졌답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부인 다룬 영화 '에비타'
남미 국가 아르헨티나는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전통적 지주 계급이 사회 지배층이었어요. 이들은 정치 세력과 결탁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만 몰두했지요.
그러던 1943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안 도밍고 페론이 서민과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해 큰 인기를 얻었어요. 그는 1974년까지 정권을 잡으면서 오랫동안 아르헨티나 국민의 지지를 받았죠. 아직도 아르헨티나 정치가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페론주의'를 활용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페론주의의 환상을 키운 장본인은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 일명 '에비타'였어요. 하층 계급 출신인 에비타는 남편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어요. 에비타라는 애칭도 국민들이 붙여준 것이죠. 에비타는 정부 내 공식적인 직책을 맡은 적은 없지만,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해 사실상 보건부 장관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에비타는 암에 걸려 1952년 33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어요.
에비타는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와 서민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칭송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남편 페론의 독재를 감춰준 방패였다는 비판도 있어요. 그녀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은 1996년 영화 '에비타'로 만들어져 개봉했어요. 영화는 페론이 아닌 에비타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요. 특히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마돈나가 부르는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노래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죠.
학살당한 시체의 무덤, 킬링필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전쟁은 캄보디아까지 영향을 미쳤어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정부군에 대항해 반정부 게릴라 단체 '크메르루주'가 수도 프놈펜까지 진입해 정권을 차지했어요. 크메르루주는 공산주의 집단이었어요. 크메르루주 지도자 폴 포트는 캄보디아에서 모든 서양적·자본주의적 요소를 없애고 공산주의 농촌 사회를 만들려 했어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죠. 그리고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학살 정책을 폈어요.
혁명은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진행됐어요. 폴 포트가 혁명을 추진하는 3년 반 동안 당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00만명이 학살·기아·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어요. '킬링필드(Killing Fields)'는 1975~ 1979년 크메르루주가 학살한 사람들의 시신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의미해요. 지금까지 2만 개 이상 킬링필드가 발견·발굴됐다고 해요.
크메르루주는 농민·노동자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사회 장애물이라 여겼어요.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교수·교사·의사·약사 등 전문직, 유학생, 중산층 이상의 사람,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와 음악가·예술가도 여기 해당됐죠. 이들을 전부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가뒀답니다. '영어를 할 수 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다' '안경을 썼다' '펜을 갖고 있다' '책을 똑바로 들 줄 안다' '시계를 볼 줄 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처형했다고 해요.
1984년 만들어진 영화 '킬링필드' 주인공 프란은 이러한 학살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큰 고통을 느껴요. 뉴욕타임스 기자의 현지 통역가이자 보조 기자였던 주인공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하다 결국 태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요.
학살의 주범 폴 포트는 1998년 가택 연금 상태에서 비참하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마지막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네요.
- ▲ 2(왼쪽부터) 1996년 영화 ‘에비타’ 포스터와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 부부의 실제 모습. 맨 오른쪽은 1950년 발코니에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페론 부부의 모습. /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코리아·페이스북
- ▲ 3(왼쪽부터) 1984년 영화 ‘킬링필드’ 포스터와 학살 주범 폴 포트. 맨 오른쪽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발견된 킬링필드. /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코리아·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