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여성이라 침묵한 어머니의 백지 일기… 저자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나가요

입력 : 2023.04.10 03:30
[재밌다, 이 책!] 여성이라 침묵한 어머니의 백지 일기… 저자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나가요
빈 일기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지음 | 출판사 낮은산 | 가격 1만5000원


이 책은 어머니와 가족, 자연, 여성과 환경 운동, 그리고 창작과 예술에 대한 경험을 다루고 있는 논픽션 회고록이에요.

이 책은 저자가 어머니의 빈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시작돼요. 암 투병 중 돌아가신 어머니는 유언으로 매년 간직해 온 일기를 저자에게 주겠다고 말해요. "네게 내 일기장을 모두 남길게. 하지만 약속해야 해. 내가 가기 전까지는 일기장을 보지 않겠다고."

저자는 그 약속을 지켰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의 일기를 읽을 시간이 왔을 때,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돼요. 일기장 수십권이 모조리 비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 책은 저자의 어머니가 왜 빈 일기를 수십권 간직했고, 죽기 직전 저자에게 남겼는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이에요. 저자가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해요.

어머니의 '빈 일기'는 어머니의 '침묵'을 의미해요. 저자의 어머니가 살던 당시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억압받았다는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또 빈 페이지는 '가능성의 공간'을 의미해요. 저자는 침묵으로 채워진 어머니의 일기장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힘으로써 빈 지면을 또 다른 가능성의 공간으로 탈바꿈해 내거든요. 이렇듯 '빈 일기'는 풍부한 은유와 흥미로운 역설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요.

저자는 어머니의 침묵이 그녀만의 말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해요. 침묵이 어떤 경우에는 그 자체로도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이 책은 여성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침묵과 고요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해요.

이 책에서는 '침묵'만큼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해요. 저자는 이를 할머니와의 추억을 통해 들려주는데요. 어머니가 침묵의 힘을 보여주었다면 할머니는 직접적으로, 정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주신 분이에요. 새를 좋아하는 저자는 여덟 살 때 탐조(探鳥)인으로서 동네 지부에 새 발견 사실을 알려요. 그러나 지부 회장은 저자의 나이 때문에 '신뢰할 만한 목격'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해요. 그때 할머니는 저자에게 "넌 네가 뭘 봤는지 알잖아. 그 새는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어.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라고 말했다고 해요. 이런 할머니 덕분에 윌리엄스는 새를 관찰하며 평생 생태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었어요.

시적이고 아름다운 저자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에요. 환경과 여성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세요.
김미향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