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로마 전성기 문 연 정치가… 그의 이름서 '7월' 유래
입력 : 2023.04.05 03:30
율리우스 카이사르
- ▲ 1899년 프랑스 화가 리오넬 로이어가 그린 갈리아 전쟁의 한 장면. 카이사르(오른쪽 붉은 옷)를 찾아온 갈리아 부족장 베르생제토릭스(왼쪽)의 모습. /위키피디아
그의 죽음을 다룬 금화가 제작될 만큼 카이사르는 로마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친 최고 권력자였죠. 숱한 명언을 남겼고 지금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7월을 영어로 'July'라고 부르는데 이는 7월에 태어난 그의 이름(율리우스·Julius)에서 따온 것이죠. 하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의 삶을 한번 따라가 볼게요.
힘 약한 정치 세력에서 출발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쯤 로마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그가 16살일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사실상 가장이 됐죠.
당시 로마는 군대 출신 장군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있었어요. 그 중심에는 귀족파였던 술라가 있었습니다. 귀족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민중파는 술라의 세가 확대되면서 계속 힘이 약해졌어요. 이때 민중파의 지도자였던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고모부였기 때문에 카이사르 또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민중파 정치인이었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해 스스로 민중파임을 숨기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기원전 84년 킨나가 갑자기 죽고 곧이어 기원전 82년에는 술라가 최고 권력자인 종신 독재관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 술라는 민중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술라는 일찌감치 카이사르의 리더십을 알아보고 그를 제거하려 했어요.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고 자기 부하로 들어오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죠.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합니다.
술라가 죽고 나서도 카이사르의 고난은 계속됐어요. 술라의 부하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 역시 카이사르를 압박했거든요. 카이사르는 이러한 불행 속에서도 차근차근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워나갔어요. 기원전 76년에는 학문의 중심지였던 로도스 섬으로 유학을 떠나 수사학(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했어요. 그는 연설의 대가가 됐어요.
삼두정치로 발판 마련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정치인은 폼페이우스만이 아니었어요. 술라 밑에서 재력가가 된 크라수스도 있었죠. 그런데 당시 입법 기관이었던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나라를 쥐고 흔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어요.
카이사르는 이를 눈치 채고 폼페이우스·크라수스와 함께 '삼두(三頭)정치'를 시작했어요. 세 사람이 로마를 분할 통치하자는 것이었죠.
여러 면에서 불리하고 힘이 약했던 카이사르는 삼두정치를 바탕으로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당시 관직 중 최고 지위)에 당선됐어요.
카이사르는 이 동맹을 더 견고하게 하고자 16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를 30살이나 많은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로마 북쪽에 있는 갈리아 지역으로 떠났어요. 이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지 세력이 확고했던 동방을 피해 갈리아에서 세력을 키운다는 목표였죠.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총 8년 동안 갈리아 정복 전쟁을 하며 이 지역을 로마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루비콘강을 건너다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합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이어주던 율리아가 죽으면서 둘 사이는 급속도로 멀어졌어요. 1년 후 크라수스마저 세상을 떠났죠.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폼페이우스 쪽에 힘을 실어줬어요.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무제한의 권한을 주는 법안을 발의했고,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에게는 군대를 해산하고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 국경선인 루비콘강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고민에 빠졌어요.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 것은 사실상 쿠데타였기 때문이죠. 이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대와 함께 강을 건넙니다. 결과는 카이사르의 대승(大勝)이었습니다. 강력한 그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로마로 들어갔어요. 궁지에 몰린 폼페이우스는 이집트까지 달아났고 그곳에서 살해당합니다.
이제 카이사르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반대 세력에게 관용을 베풀며 로마를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신전과 각종 공공건물을 세웠고 부채 삭감, 세금 제도 개선 등 정책을 실시했죠. 또 그는 이집트인들이 사용하였던 태양력을 로마에 도입해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달력의 기초가 된 율리우스력이에요.
비참한 최후
하지만 이러한 모든 정책은 그를 중심으로 한 독재 체제에서 실행됐어요. 그는 임기가 평생인 종신 독재관이 됐어요. 이제 카이사르는 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카이사르가 권력을 독차지하는 것에 반대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카이사르를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어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반대파에게 23곳이나 칼에 찔리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요. 여기에서 카이사르의 유명한 말 하나가 또 등장합니다. 카이사르는 죽기 직전 자신을 죽이러 온 무리 틈에서 브루투스를 발견했어요. 그는 카이사르의 연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어요. 죽기 직전 그를 본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겼어요.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들이 암살자 무리를 몰아냈습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신격화해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후에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인물입니다.
- ▲ (위 왼쪽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카이사르, 술라,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조각상. /위키피디아
- ▲ 1888년 영국 화가 윌리엄 홈즈 설리번이 그린 ‘브루투스 너마저(카이사르의 죽음)’ 그림. /위키피디아
- ▲ 카이사르 암살 기념 금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