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전쟁 폐허 속 아이들·고양이 그려 평화 메시지 전했죠

입력 : 2023.03.29 03:30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

뱅크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선을 든 소녀’.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선을 든 소녀’.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최근 그라피티(graffiti·건물 외벽에 스프레이·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 작가 '뱅크시'로 추정되는 남성의 모습이 목격됐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20일(현지 시각) 전했어요. 보도에 따르면 뱅크시의 가장 최근 작품이 그려졌던 영국 켄트 지역 한 농가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뱅크시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대요.

뱅크시는 정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그라피티 작가입니다. 신상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항상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작품을 만들고 사라지죠.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작품을 공개하고 나서야 그의 작품임을 알 수가 있어요. 뱅크시의 작품은 반(反)권위적이고 기존 예술을 비판하는 성향을 띠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정확한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수많은 팬이 있습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제치고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1위'로 뽑히기도 했지요. 영국뿐만이 아니에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예술가죠. 그라피티는 1980년대 자유와 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빠르게 확산했어요. 단순한 낙서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담아 대중들의 눈길을 끌었어요. 뱅크시는 분쟁 지역과 같은 역사적 현장에도 그림을 그렸답니다. 어떤 곳에서 그의 작품들이 등장했는지 한번 찾아가 볼까요?

가자 지구 건물 잔해에 고양이 그림

이스라엘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던 나라였어요. 이스라엘 민족을 흔히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2000년 넘게 '나라 없는 민족'이었죠. 이들은 19세기 말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 건설을 추진하는데요. 이 지역에 이미 살고 있던 아랍 민족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UN)이 나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해 아랍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결의안을 채택했어요. 이스라엘은 이 결의안을 받아들여 이듬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선포했죠. 아랍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양측 간에 여러 차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1993년 평화 협정인 '오슬로 협정'이 체결됩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아랍인들)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중지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국가 수립을 위한 땅을 단계적으로 돌려준다는 내용이었어요. 하지만 양측의 테러는 계속됐어요. 특히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서 떨어져 나온 무장 정파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이곳에서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유혈 충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뱅크시가 처음 이곳에 등장한 때는 2005년이었어요. 뱅크시는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을 방문해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곳곳에 남겼어요. '꽃을 던지는 남자' '방탄조끼를 입은 비둘기' '풍선을 든 소녀' 등 9개의 벽화 작업을 했어요.

2015년에는 폐허가 돼버린 가자 지구 건물 잔해에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고철을 갖고 노는 모습을 그렸어요. 이 그림은 유명해졌어요. 그는 그림을 통해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심 가질 것을 촉구했어요. 2005년부터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뱅크시 작품은 팔레스타인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매에 부쳐졌어요. 작품들이 있는 곳은 세계적 관광 명소가 됐어요. 팔레스타인 지역의 평화를 기원하는 그의 마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죠.

2017년 뱅크시는 베들레헴 지역에 호텔을 지었어요.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이 호텔 내부에 전시했지요. '베개 싸움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 투사' '최루탄을 피해 산소 마스크를 하는 조각상'처럼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패러디한 작품들이 있다고 해요. 뱅크시가 이 호텔을 만든 이유는 팔레스타인의 평화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거예요.

푸틴에 대항하는 7점의 벽화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어요. 뱅크시는 지난해 11월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도심 곳곳에 벽화 7점을 남겼어요.

보로 카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북서쪽으로 60㎞가량 떨어진 곳으로, 지난 2월 러시아가 첫 공습을 감행한 도시예요. 이 지역은 공습으로 최소 300명이 사망했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됐죠. 뱅크시는 지난해 11월 14일 인스타그램에 '보로 카, 우크라이나'라는 글과 함께 물구나무선 체조 선수를 그린 벽화 사진 3장을 올렸어요.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의 잔해 위에서 물구나무선 채 균형을 잡고 있는,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체조 선수는 현재 우크라이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요.

또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 뱅크시 작품으로 추정되는 벽화도 발견됐는데, 러시아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 벽면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닮은 남성이 어린 소년에게 업어치기를 당하는 그림이에요.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유도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벽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빗댄 것으로 보여요.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의 침공 1년 만인 지난 24일 뱅크시의 작품으로 기념우표를 발행했대요. 앞서 말했던 폐허가 된 건물의 벽면에 그려진 '푸틴 업어치기' 벽화를 우표로 발행한 것이에요. 키이우 시민들은 우표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섰다고 해요. 우표의 내용처럼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겠죠.

뱅크시의 그림에는 소녀와 아이들이 자주 등장해요. 폭력과 전쟁 속에서 이들을 지키기 위해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하는 거죠. 그는 '자유, 평화, 정의'의 메시지를 담은 그라피티를 역사적 현장에 그리면서 예술이 평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뱅크시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그린 그림들.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그린 그림들.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그린 그림들.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그린 그림들.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베들레헴 지역에 지은 호텔 내부.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베들레헴 지역에 지은 호텔 내부.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우크라이나 보로 카에 그린 ‘물구나무선 체조 선수’.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뱅크시가 우크라이나 보로 카에 그린 ‘물구나무선 체조 선수’.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우크라이나 당국이 뱅크시의 ‘푸틴 업어치기’ 벽화를 우표로 발행한 것.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우크라이나 당국이 뱅크시의 ‘푸틴 업어치기’ 벽화를 우표로 발행한 것. /뱅크시 홈페이지·뱅크시 인스타그램
기획·구성=안영 기자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