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한 때 혼인으로 동맹 맺었다가… 이란 혁명 후 관계 끊겼죠
입력 : 2023.03.22 03:30
이란과 이집트
- ▲ ①이란의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왼쪽)와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오른쪽) 대통령. ②이란 국기 ③이집트 국기 ④이란의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의 첫 번째 부인인 이집트의 공주 파우지아. 미모가 뛰어나 ‘아시아의 비너스’ 소리를 들었어요. ⑤‘이란이슬람공화국’을 세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⑥지난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무사드 빈 무함마드 알아이반(맨 왼쪽) 사우디아라비아 국가안보보좌관과 알리 샴카니 이란 최고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이 손을 맞잡고 있어요. 가운데는 이들을 중재한 왕이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입니다. /위키피디아, 로이터 뉴스1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이란이 이번에는 이집트와의 관계 개선을 원한다고 발표해 많은 이가 놀랐어요. 이란과 이집트도 40년 넘게 대립했던 중동의 대표적인 앙숙이거든요. 13일(현지 시각)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이란과 이집트 양국은 서로에 중요하다"고 밝혔어요. 또 "우리는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조처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여 관계 회복에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냈어요. 이란은 왜 같은 이슬람 문화권의 이집트와 관계가 멀어졌던 것일까요?
수천년에 걸쳐 얽힌 관계
이란은 유럽·아프리카·아시아의 중간에 있어 다양한 국가의 영향을 받았어요. 그중에서도 페르시아 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어 여느 이슬람 국가와 다른 문화적 특수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집트와는 고대부터 수천년에 걸쳐 얽혀 있는 관계예요. 이란의 고대 왕조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기원전 559~기원전 330)가 이집트를 점령했던 때도 있어요.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100여 년 동안 페르시아 왕들이 파라오를 겸했지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에 관대한 정책을 펼쳐 문화와 종교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나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집트를 강압적으로 통치했고, 이집트인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기원전 5세기 말에 독립했어요.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이슬람 제국의 정복 활동으로 이집트·이란 모두 이슬람화돼요. 두 국가는 새로운 종교와 언어·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16세기 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1299~1922)이 이집트를 정복했어요. 한편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내려온 시아파 계열의 사파비 왕조(1501~1736)가 이란에 제국을 건설해요.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근본주의 성향으로, 정복지의 수니파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면서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는데요. 특히 수니파 국가이자 이집트를 정복했던 오스만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결혼 동맹과 이란 혁명
20세기 들어 이란의 팔레비 왕조(1925~ 1979) 때는 시아파와 수니파 국가라는 종교적 차이에도 이란과 이집트는 일반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었는데요. 이집트와 이란이 결혼 동맹을 맺었던 적도 있답니다. 훗날 이란 혁명(1979)으로 쫓겨나는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는 결혼을 총 세 번 했는데요. 첫 번째 부인이 바로 이집트의 공주 파우지아였어요. 1939년 왕세자였던 팔레비와 파우지아 파루크 공주 사이에 정략 혼담이 오갔습니다. 이는 팔레비의 아버지인 리자 샤(shah·페르시아어로 '왕')가 당시 훨씬 더 부유했던 이집트 왕실과의 강력한 정치적 결합을 원해 내린 결정이었죠. 파우지아 공주는 미모가 뛰어났는데요.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불릴 정도였어요. 두 사람은 딸 하나를 낳았지만 결국 파우지아의 향수병(鄕愁病) 때문에 1948년 공식적으로 이혼했어요.
이후 197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중심으로 이란 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친서방 성향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렸어요. 호메이니는 이슬람원리주의(이슬람교리를 정치·사회 질서의 기본으로 하는 이슬람화 운동)에 입각한 '이란이슬람공화국'을 세웠어요. 이란의 마지막 왕인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는 이집트로 망명했는데 오랜 친구였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그를 받아주면서 양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됐어요. 같은 해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이란과 이집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이란의 새로운 지도자인 호메이니가 "미국은 큰 사탄, 이스라엘은 작은 사탄"이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해 이스라엘과 이란은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리자 팔레비는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80년 7월 암으로 사망해 카이로에 묻혔어요.
그런데 사다트 대통령도 약 1년 뒤 암살당해 생을 마감해요. 사다트가 주도했던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었는데요. 이집트 내에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이교도 국가라고 생각하고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1981년 10월 사다트는 열병식을 관람하던 도중 이슬람주의자 군인들의 공격을 받고 숨졌어요. 이때 이란 정부가 테헤란의 한 거리에 사다트 암살을 주도했던 칼레드 알이슬람불리의 이름을 붙여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어요.
이란·사우디 관계 회복했어요
201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활동하던 이란 출신 시아파 종교 지도자 셰이크 님르 알 님르(Sheikh Nimr al-Nimr)는 반정부 활동과 테러 주도 혐의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처형됐는데요. 이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단교(斷交)했는데, 지난 11일 화해로 관계가 회복됐지요. 이번 합의에서는 앞으로 상호 대사관 설치, 상호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등을 약속했어요.
몇몇 국가는 이번 합의가 중동 지역 정세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하는데요. 이집트·이라크·아랍에미리트 등의 국가들이 양국의 화해 소식에 긍정적인 입장을 비췄거든요. 특히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사우디·이란 관계 정상화 합의가 지역 내 긴장 해소에 중요한 걸음"이라고 평가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