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일제 말 조선인 2000명 동원한 강제 노역 현장이죠
입력 : 2023.01.26 03:30
사도(佐渡)광산
- ▲ ①사도광산 입구. ②사도광산 내부 터널. ③사도광산 내부에 건설된 갱도(坑道·광산의 갱 안에 뚫어놓은 길. 광석이나 자재를 나르고 바람을통하게 하는 데 사용해요). 사도광산 관리회사는 이 갱도에서 쓰였던 광석 운반 수단을 이렇게 전시해놓았어요. ④일제 말 광산 노동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745명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 /위키피디아·조선DB·연합뉴스
"베개 주변에 늘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사도광산에서 일했던 홍동철씨는 광복을 맞아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워 지내다 피를 토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병석에서 "(광산에서 먹은) 돌가루는 몸으로 파고 들어가서 낫지 않는다"고 호소했고, 베개 주변에는 늘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고 해요. 같은 광산에서 일한 김종원씨 역시 병석에 누워 지냈는데 평생 진폐증에 시달렸다고 해요.
진폐증이란 폐에 먼지가 쌓이는 직업병으로, 폐 조직 속에 섬유 증식 변화를 일으켜 심폐 기능이 떨어지는 증상입니다. 이 사례들은 일제강제동원& 평화연구회의 정혜경 대표연구위원과 허광무 연구위원이 2021년에 낸 책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에 실린 증언입니다. 이들을 비롯해 사도광산의 노역 작업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왜 조선 사람들을 사도광산으로 끌고 갔던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 당시 한 일본인 공무원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내지인(일본인) 노무자 중 진폐증 환자가 많아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내지의 젊은이들이 군대로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조선인은 전쟁 중 부족했던 일본인 노동자를 대체할 새로운 인력이었고, 일제는 식민지 백성이 진폐증에 걸리는 것에 대해 걱정 같은 걸 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하루에 한 명꼴로 사고 당한 '죽음의 광산'
사도광산은 니가타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을 가면 닿는 사도 섬에 있는 금속광산입니다. 일본 중세시대부터 유명한 귀양지였고, 1542년 은 채굴이 시작돼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의 침략 자금으로 쓰였죠. 에도(江戶) 시대(1603~1868)에는 금 광산으로 유명했습니다. 에도 시대란 현재의 도쿄인 에도를 본거지로 막부(幕府·쇼군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지닌 정부)가 집권한 시대를 말합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기계화 시설이 도입됐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태평양전쟁 때는 구리·철·아연 같은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활용됐습니다. 한마디로 침략 전쟁의 군수물자 보급 기지가 됐던 것이죠.
문제는 사도광산의 노동 환경이 대단히 열악했다는 것입니다. 에도 시대 사도광산에서 일했던 일본인 노동자들은 3~5년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다고 하는데, 진폐증을 유발하는 환경, 광산 지형을 변형시킬 정도의 중노동, 낙반(落磐·광산 안에서 천장이나 벽의 암석이 떨어지는 사고)과 매몰 등의 사고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던 것이죠. 마흔 살을 넘어서까지 살아남은 광부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럼 누가 여기서 일했을까요? 잡혀온 부랑자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근대 광산으로 변모한 뒤에도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35년 7월의 자료를 보면 '하루에 한 명꼴로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조선인에겐 퇴직 자유 없어… 14.7% 달아나
1939년 2월, 이 열악한 광산에 새로운 인력이 동원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동원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 측 연구에 따르면, 이때부터 1945년까지 2000명 정도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광산 측 자료에 의하면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모두 6차에 걸쳐 조선인 1005명이 동원됐고, 1945년 현재 조선인은 사도광산에 모두 1519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광부 명부 중 일부는 사도섬에 있는 사도박물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조선인 연초 배급 명부'에는 기숙사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기록돼 있고, '조선총독부 지정연령자연명부'에도 조선인의 이름과 생년월일·본적지 등이 적혀 있습니다. 이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조선인 745명의 이름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조선인 광부들의 처지는 일본인 광부보다 좋지 않았습니다. 운반부와 바위에 구멍을 뚫는 착암부 등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합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노동쟁의(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임금, 노동 시간, 노동 조건 등에 관한 이해 대립으로 일어나는 분쟁)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기간에서 동원된 조선인 1005명 중 10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또 이들 중 148명이 도주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14.7%에 이르는 인원이 고된 노동 현장을 피해 달아난 것인데, 이것은 조선인에겐 퇴사나 휴직을 할 자유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유산의 '기간'을 한정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에도 시대와 그 이전의 금 채굴 유산으로만 의미를 한정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인 강제 노동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이죠.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사도광산의 시설은 모두 근대 이후의 것으로 조선인 강제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광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세계문화유산 재신청은 한·일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양국의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군함도]
일본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일본의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유산'이 있습니다. 철광·조선·탄광 등 19세기 후반의 여러 근대 산업 시설 유적들을 묶은 개념인데, 이 중에서 하시마(端島)·다카시마(高島)·미이케(三池) 탄광과 나가사키(長崎) 조선소, 야하타(八幡) 제철소 등은 사도광산과 마찬가지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던 곳이라 한국 정부와 국민의 항의를 받았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이 '군함도'라는 별명으로 불린 하시마 탄광입니다. 1943~1945년 500~800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있었다고 추정되며 하루 12시간 채탄 노동에 시달려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곳이죠. 일본은 이곳 시설들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면서 '조선인 강제 징용 사실을 알리는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