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사소한 역사] 중국 주나라 기록에 첫 등장…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시작됐어요

입력 : 2023.01.17 03:30

봉화

충남 공주시 옥룡동 월성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유적. /공주시
충남 공주시 옥룡동 월성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유적. /공주시
과거에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설치된 통신 수단인 봉수(烽燧) 유적 14곳이 얼마 전 국가 지정 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어요. 봉수는 각 지역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돼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내며 군사적 위기 상황을 알리는 시스템인데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봉화(烽火)라고도 불렸습니다. 오늘은 봉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봉수에 대한 첫 역사적 기록은 중국 주나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나라의 임금이었던 유왕(재위 기원전 781~기원전 771)은 포사라고 하는 절세 미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요. 포사는 잘 웃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실수로 봉화대에 잘못된 신호가 올라오는 바람에 중국 각지의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호경에 몰려드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때 포사가 이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자, 포사의 웃음을 보고 싶었던 왕은 실제 위기 상황이 아닌데도 봉화를 올리곤 했습니다. 문제는 왕이 거짓 봉화를 계속 올리다 보니, 제후들이 봉화의 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이민족인 견융(犬戎)이 진짜로 주나라를 공격했을 때 올라온 봉화에 제후들은 반응하지 않았고, 주나라의 수도는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봉수제도는 더욱 체계화됐고,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봉화대에 불을 붙이는 개수도 달라졌다고 해요.

한국에서 봉수제는 삼국시대에 시작됐다고 알려졌지만, 고려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체계화됩니다. 고려와 조선 때는 평상시에도 그 지역 여러 봉화대 중 한 개에는 불을 붙여놓도록 했는데요. 만약 평시에 봉화대에 불을 꺼둔 상태라면 봉화대에 불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안전해서인지 봉화대가 점령당해서인지 알 수가 없죠. 하지만 평소에 늘 봉화대에 불이 붙어 있는데 갑자기 봉화대 불이 완전히 꺼지면 봉화대가 적에게 점령당한 위급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봉화의 단점은 위급 상황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습니다. 한자를 사용하던 동양권에서는 주로 말[馬]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擺撥)을 함께 사용했어요.

하지만 한자보다 글자 수가 적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양권에서는 봉화만 가지고도 간단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봉화를 통해 간단한 암호문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했다고 해요. 1790년에는 프랑스 발명가 클로드 샤프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전송할 수 있는 봉수 시스템을 개발했어요. 움직일 수 있는 목제 신호기가 설치된 등대를 10~15㎞ 거리마다 세우고, 신호기의 움직임에 알파벳을 배당해 통신할 수 있게 만들었죠. 이 시스템은 이후 나폴레옹이 채택해 프랑스 전 지역으로 확산했고, 전신(電信)을 이용한 통신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유럽 사회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김현철 서울 영동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