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흙으로 빚어 만들어… 높이 95㎝ 불상 받침도 발견됐죠

입력 : 2023.01.05 03:30

백제의 소조상

왼쪽은 부여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소조상 중 3인상. 옷차림이나 자세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른쪽은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여러 형태의 소조상 조각들. 목탑 내부를 장식하던 것으로 추정돼요. /국립부여박물관
왼쪽은 부여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소조상 중 3인상. 옷차림이나 자세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른쪽은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여러 형태의 소조상 조각들. 목탑 내부를 장식하던 것으로 추정돼요.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이번 달 29일까지 '백제 기술, 흙에 담다' 특별전을 열어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흙'이라는 재료에 주목하여 백제인의 흙 다루는 기술과 흙으로 만든 소조상(塑造像)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죠. 그 기술과 예술성으로 주변 국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백제의 국력도 함께 느껴볼 수 있답니다. 백제의 흙 다루는 기술과 그것을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백제 장인의 솜씨에 대해 알아볼까요.

흙으로 빚은 예술 작품

흙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로 원하는 모양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백제는 일찍부터 좋은 흙을 이용해서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고, 특히 연꽃무늬 기와나 벽돌을 많이 제작했어요. 부드러운 회백색을 띠는 백제 토기들은 고구려(붉은색 계통)나 신라(회청색 계통)와 다른 독특한 색깔을 보여줍니다.

백제의 옛 절터에서는 흙을 이용해서 불상도 만들고 사람이나 동물·식물 모양도 제작했어요. 고운 점토를 이용해 모양을 만든 다음 낮은 온도로 구워냈는데 이를 '소조상'이라 부르죠. 흔히 테라코타(terra cotta)라고 합니다.

불상을 만드는 여러 재료 가운데 가장 경제적이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재료가 흙이에요. 흙으로 만든 소조상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해왔죠. 대개는 불상 하나하나를 손으로 빚었지만, 거푸집을 이용해서 대량으로 찍어내기도 했어요.

소조상은 보통 나무로 골조를 만든 다음, 접착력이 좋은 점토를 여러 차례 덧붙여 형태를 만들고, 표면을 채색해서 완성해요. 백제 소조상 역시 나무를 이용해 골조를 만들었죠.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곳은 골조로 철사를 활용하기도 했어요. 중형이나 대형 소조상들은 안쪽과 바깥쪽에 사용하는 흙의 종류가 달랐는데요. 안쪽에 사용한 거친 흙은 겨와 지푸라기를 잘게 썰어 넣어 수축과 갈라짐을 방지했고, 바깥쪽에는 부드러운 점토를 사용해 표면을 매끈하게 처리했어요.

표면에는 흰색 안료를 얇게 발랐는데, 채색을 위한 바탕칠로 보입니다. 백제 소조상들은 표면에 백색이나 적갈색·흑색 등으로 문양을 그리거나 채색을 했는데요. 백색은 납, 적갈색은 납이나 철, 흑색은 구리나 철을 주성분으로 한 안료를 사용했어요.

표면을 금으로 장식한 흔적도 발견됐어요. 부여 정림사지와 부소산사지에서 발견된 소조상의 표면에는 금이 알갱이 형태를 이루거나 녹아서 눌어붙은 듯한 모습이 남아 있어요. 두 절터에서 모두 화재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에, 금박 표면 장식이 열을 받아 알갱이 형태로 변형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조상, 사찰 목탑을 꾸미다

공주와 부여·익산에서 발견된 소조상들은 백제의 옛 절터에서 불에 탄 기와나 토기들과 함께 섞여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요. 부여 정림사지의 경우 커다란 구덩이가 발견됐는데 크기와 종류가 다른 200여 점의 소조상이 출토됐어요. 이 소조상들은 원래 사찰의 어느 공간에 놓여 있었을까요. 기록은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목탑 내부에 불교 경전의 내용을 소조상으로 꾸며놓은 사례가 종종 발견돼요. 부여나 익산의 백제 절터에서도 목탑지 근처에서 소조상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지요. 따라서 정림사지에는 지금 있는 석탑 이전에 원래는 목탑이 있었고, 소조상들은 그 목탑 내부를 꾸미는 데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림사지 소조상 중에서 3명의 인물상 파편이 특히 주목되는데요. 발굴 당시부터 머리는 사라져 있고 목 아랫부분만 남아 있었어요. 한가운데 중심인물이 양팔을 벌린 채 서 있고, 좌우에는 그를 시중드는 듯한 인물들이 서 있어요. 세 인물은 모두 무릎을 가리기 위해 치마 앞으로 내려뜨리는 천인 폐슬(蔽膝)을 걸치고 있는데요. 중국에서 폐슬은 황제를 비롯해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착용할 수 있었어요. 따라서 폐슬을 착용한 채 시중드는 사람을 거느린 가운데 중심인물은 백제왕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익산 제석사지의 경우 절터에서 북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수백 점의 소조상 파편이 발견됐어요. 백제 무왕 때인 639년, 제석사 7층 목탑을 비롯한 사찰의 모든 건물이 화재로 전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당시의 목탑 내부를 꾸미던 소조상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버려진 거죠.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발견된 소조상들은 양감이 풍부하고 생동감이 넘쳐 부여 지역 소조상보다 훨씬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줘요.

청양 본의리 가마터에서는 흙으로 빚은 대형 불상 받침이 발견됐어요. 이 불상 받침은 높이 약 95㎝로, 원래 무게가 약 680㎏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예요. 정면에서 보면 두 겹의 연꽃과 치맛자락이 역동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돼 있어요. 점토를 빚어 전체적인 형태를 만든 다음 그것을 가마에서 굽기 위해 7개의 조각으로 잘라냈어요. 하지만 불상 받침의 크기가 워낙 커 그것을 건조하고 굽는 과정에서 수축과 뒤틀림이 발생했고, 실제 사용하지는 못했다고 해요. 이런 실패에도 굽히지 않는 장인들의 계속된 도전이 있었기에, 백제는 미륵사 석탑을 만들 수 있었고, 후일 신라·일본의 사찰 건축이나 공예 기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어요.

일본에 전래된 제작 기술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 각지에서 갑자기 소조상이 유행하기 시작해요. 이 시기 수준 높은 불상들이 제작됐는데요. 이는 백제 멸망 이후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죠. 이들은 수준 높은 학문과 선진 기술을 일본에 전파했어요. 덕분에 일본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죠.

이들 중 조각 장인이 얼마나 포함됐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7세기 후반 일본의 소조상들은 제작 기법과 세부 표현, 조형성 측면에서 백제 소조상이 그대로 계승됐음을 확인할 수 있죠. 수준 높은 소조상 제작 기술을 가진 백제 유민 조각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답니다.
익산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출토된 소조상 조각들. 원래 7층 목탑 내부를 꾸미던 것들인데, 639년 화재로 목탑이 불타면서 사찰 외곽에 버려졌어요. /국립부여박물관
익산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출토된 소조상 조각들. 원래 7층 목탑 내부를 꾸미던 것들인데, 639년 화재로 목탑이 불타면서 사찰 외곽에 버려졌어요. /국립부여박물관

청양 본의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만든 불상 받침. 우리나라 고대 조각 중 가장 대형에 속해요. /국립부여박물관
청양 본의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만든 불상 받침. 우리나라 고대 조각 중 가장 대형에 속해요. /국립부여박물관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