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맹세에서 저격까지… 안중근 의사 생애 마지막 1년 다뤘죠
뮤지컬·영화 '영웅'
- ▲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가운데 맨 앞)과 동지들이 손가락을 절단하고 혈서를 써 독립의 결의를 다지고 있는 장면. 사람들 뒤로 핏빛으로 ‘대한독립’이라고 새겨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에이콤
1909년 2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러시아 연해주 남단 크라스키노. 흰 눈이 덮인 자작나무 숲에 안중근 의사(1879~1910)와 독립운동 동지 11명이 모였습니다. 안 의사는 왼손 넷째 무명지를 잘라내 태극기 위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혈서를 써내려 갑니다. 흰 눈 위로 검붉은 핏빛이 번지고, 동지들은 다 같이 '대한독립 만세'를 비장하게 외칩니다. 이 장면으로 뮤지컬 '영웅'(오는 2월 2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의 막이 오릅니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그린 작품입니다. 1909년 12인이 설원에 서서 피로써 동맹을 맺는 순간부터, 같은 해 10월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 그리고 이듬해 3월 그가 사형을 언도받는 순간까지 주요 장면들이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지요.
이 공연은 벌써 아홉 번째 시즌을 맞이했습니다. 2009년 당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초연(初演)된 이래 10여 년 동안 꾸준히 무대에 올랐습니다. 오랜 기간 관객들의 반응을 더해 수정을 거듭하면서 점점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발전해왔어요.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로 작품성을 인정받아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더 뮤지컬 어워즈 최우수창작뮤지컬상' '한국뮤지컬대상 최우수작품상' 등 국내 중요한 공연상을 모두 휩쓸었지요. 해외에서도 화제가 됐는데요. 뉴욕의 링컨센터뿐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바로 그 장소, '하얼빈 환구극장무대'에도 올라 한국 창작 뮤지컬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최근 뮤지컬 '영웅'의 재공연에 맞춰 동명(同名)의 뮤지컬 영화 '영웅'도 개봉했는데요. 극장가에서 한창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의 주요 노래와 장면들을 영상으로 옮겨 놓은 장르인데요.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모여 있는 대규모 군중 장면 등이 무대와 영상에서 어떻게 다르게 연출됐는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뮤지컬과 영화 모두, 극의 시작은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혈서로 맹세하는 장면이지요.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뮤지컬의 대표곡인 '장부가'의 몇 소절처럼 안중근 의사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독립의 꿈은 한참 후인 1945년 8월 15일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뮤지컬 '영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극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두 가상의 여성을 등장시킵니다. 명성황후가 아꼈던 궁녀 설희와 안중근의 중국인 친구인 왕웨이의 여동생 링링이죠. 설희는 일본인 자객들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걸 보고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샤(기생)가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접근해 유혹한 다음 기밀을 빼내 안중근 의사가 이끄는 독립군에게 넘기죠. 중국인 링링은 안중근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는 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해요. 결국 링링은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는 안중근을 대신해 총을 맞고 숨을 거둡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성은 바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아들이 사형을 기다리며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는 편지와 함께 수의를 지어 보냅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이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어머니의 편지가 낭독될 때 객석의 많은 관객이 울음을 터트립니다.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다지는 강인한 모성(母性)과, 아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끊어질 듯한 슬픔과 대비되면서 큰 울림을 줍니다. 영화 '영웅'에서는 나문희 배우가 어머니 역을 맡아 편지 구절을 노래로 낭독하는데, 여느 가수의 가창력으로도 전달되지 않는 애절함이 절절히 와닿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사랑받은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사실적으로 담은 탄탄한 스토리, 완성도 있는 노래가 조화된 작품이에요. 하얼빈역에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은 영상효과(CG)로 처리됐지만 마치 실제 열차가 들어오는 듯한 사실감이 전해지고, 독립군과 일본 경찰의 쫓고 쫓기는 추격 장면에서 긴박감 넘치는 음악과 안무는 우리나라 무대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줍니다.
['단지(斷指) 동맹' 기념비]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쓰며 동지들을 이끌었던 러시아 크라스키노에는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어요. 2001년 10월 최초로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두 차례나 옮겨지는 수난을 겪다가 2011년 8월에야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됐죠. 크라스키노는 지금 러시아 연해주에 속해 있지만, 과거에는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반도 영토였답니다. 일본과 신라에서 온 사절단이 드나들 정도로 해상·육상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죠.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적이 '크라스키노 토성(土城)'인데, 이 성은 고구려 안장왕(?~531년) 때 축조되었다고 해요. 크라스키노에서 동맹을 결성한 안중근 의사의 굳은 결의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 ▲ 이토 히로부미. 야심 가득한 눈을 번뜩이고 있죠. /에이콤
- ▲ 안중근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앞두고 착잡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어요. /에이콤
- ▲ 안중근이 사형을 앞두고 있는 모습. /에이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