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명화 돋보기] 예수 태어난 마구간, 성모, 천사 모습 담았죠

입력 : 2022.12.26 03:30

아기 예수 탄생을 그린 그림

조르주 드 라 투르, ‘갓 태어난 예수’(1645년경) /렌 미술관
조르주 드 라 투르, ‘갓 태어난 예수’(1645년경) /렌 미술관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성탄절에 축하 메시지를 주고받습니다. 마치 연말연시에 주고받는 따스한 인사말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하지만 성탄절은 본래 그리스도교 전통과 문화를 지닌 나라들의 경축일이었어요. 과거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유럽에서는 화가들이 성서에 묘사된 예수 탄생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상상해 그리곤 했습니다. 신생아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볼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주제가 바로 '예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화가들이 어떻게 신생아의 모습을 표현했는지, 예수 탄생의 그림들을 살펴볼까요?

〈작품1〉은 1645년쯤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1593~ 1652)가 그린 '갓 태어난 예수'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유럽 화가들은 극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빛과 어둠을 뚜렷하게 대비시킨 그림들을 종종 그렸어요. 이 그림도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 전, 주변은 암흑처럼 어두웠어요. 아기가 태어나자 깜깜하던 주변이 눈이 부시도록 환해지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어둠을 다 물리칠 빛과 같은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붉은 옷을 입은 성모(聖母) 마리아가 소중하게 아이를 받아 안아봅니다. 아이는 팔과 다리까지 흰 천으로 꽁꽁 둘린 채 눈을 감고 있어요. 라 투르는 앞으로 벌어질 예수의 죽음을 미리 암시하기 위해 이렇게 아기를 표현했어요. 또한 마리아가 가로로 누운 아들을 무릎 위에 놓으려는 자세는 훗날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마리아의 슬픔을 예견하는 것이지요. 이를 '성모의 피에타(piet ·이탈리아어로 슬픔이라는 뜻)' 이미지라고 부르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입니다. 라 투르의 그림은 아기가 탄생하는 기쁜 순간에 죽음의 슬픔을 슬며시 떠올리게 합니다.

설교와 함께 보던 생생한 탄생화

과거 유럽의 교회에서는 성탄절 제단에 놓을 예수 탄생 그림을 이름난 화가들에게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신자들이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을 보면 설교만 듣는 것보다 훨씬 생생하게 기뻐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 예가 〈작품2〉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1415~1492)가 1475년에 완성한 '예수 탄생'이지요. 성서에 따르면 마리아는 허름한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고, 네모난 구유(가축 먹이통) 안에 아이를 처음 눕혔다고 해요. 그림 속에 소가 등장하고, 뒤로 축사같은 건물이 보이네요. 마리아와 아기 뒤로 악기를 든 다섯 명의 천사가 축하 연주를 해주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의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년쯤~1510)가 그린 '예수 탄생'〈작품3〉에서는 마구간이 좀 더 상세하게 나와요. 당나귀와 소가 아이를 정겨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날개 달린 세 명의 천사는 지붕 쪽에서 축복을 내려주고 있어요. 아이는 천사들에게 인사하듯 위를 쳐다보며 한 손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작품4〉는 1476년쯤 네덜란드의 휘호 판 데르 휘스(Hugo van der Goes·1440년쯤~1482)가 그린 '목자들의 경배'입니다. 마구간에 여럿이 모여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해 주고 있어요. 희거나 붉은 날개를 달고 왕관을 쓴 천사들이 아기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어요. 오른쪽 위쪽에 그려진 소박하고 순진해 보이는 사람들은 양치기들입니다. 아기 예수는 누운 바닥에서도 몸 주변으로 빛이 퍼져 나가고 있네요.

구유 장식 풍속 여러 나라로 확산

13세기에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은 교회에 나오지 못하거나 성서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냈는데요. 마구간처럼 꾸며 놓고 사람들이 마치 그림 속 인물처럼 보이도록 대사는 없이 가만히 정지한 채로 있는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림을 입체로 만든 것 같은 이런 전시를 프랑스어로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살아있는 그림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문맹의 신자에게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고안한 이 아이디어는 이후 여러 나라로 퍼져 성탄절의 구유 장식 풍속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사람 대신 조각상이나 인형으로 대신한 자그마한 구유 모형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 모형은 교회가 아닌 곳에 설치해 놓을 경우, 특히 공공의 장소라면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러 종교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특정 종교 하나만을 강조하는 듯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연말연시에는 종교의 다름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을 전하고 어두운 구석에까지 빛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주고받곤 해요. 그러나 슬프게도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한 나라 안에서 갈등이 계속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앞서 라 투르가 그린 그림에서 왜 탄생의 기쁨과 상실의 슬픔이 교차하는지 짐작할 것 같습니다. 아직 세상이 진정으로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 탄생’(1475) /런던 내셔널 갤러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 탄생’(1475)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산드로 보티첼리, ‘예수 탄생’(1473년경) /컬럼비아 미술관
산드로 보티첼리, ‘예수 탄생’(1473년경) /컬럼비아 미술관
휘호 판 데르 휘스, ‘목자들의 경배’(1476년경) /우피치 미술관
휘호 판 데르 휘스, ‘목자들의 경배’(1476년경) /우피치 미술관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