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월드컵 준결승의 두 국가… 44년간 지배국·식민지 관계였죠

입력 : 2022.12.21 03:30

프랑스와 모로코

지난 14일 모로코가 프랑스와의 카타르 월드컵 경기에서 패하자 모로코 축구 팬들이 길거리에서 불을 지르고 있는 모습. 모로코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AFP 연합뉴스
지난 14일 모로코가 프랑스와의 카타르 월드컵 경기에서 패하자 모로코 축구 팬들이 길거리에서 불을 지르고 있는 모습. 모로코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AFP 연합뉴스
지난 19일 2022 카타르 월드컵이 막을 내렸습니다. 월드컵이 진행되는 약 4주간 전 세계인은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열정적으로 응원했고 그 과정에서 웃기도, 울기도 했지요. 특히 역사적인 관계로 주목을 받았던 경기들이 있는데요. 4강에서 맞붙었던 프랑스와 모로코의 경기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모로코가 프랑스에 지자 흥분한 모로코 축구 팬들은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난동을 부리기도 했어요. 이는 모로코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인데요. 당시 어떤 과정을 통해 모로코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건지 알아볼까요?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했어요. 유럽은 새로운 공업 원료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고, 자국 내의 잉여 자본을 투자하고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들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를 '제국주의'라고 불러요. 특히 아프리카는 제국주의와 열강 간의 이해관계가 가장 명확히 드러난 지역이었어요. 처음에는 열강들이 적극적으로 식민지 확보 정책을 펼치다가 땅을 다 나눠 가지게 되자 그들 사이에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이 시작됐거든요.

그렇다면 모로코는 언제부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일까요? 모로코는 8세기에 최초의 이슬람 왕조를 건설한 이후 독립적인 국가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서쪽으로 세력을 떨쳤을 때에도 모로코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 밖에 있었습니다. 물론 왕조 간의 갈등과 내부의 권력투쟁이 이어졌지만, 모로코는 19세기 초까지 통일 국가를 유지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모로코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유럽의 지배에 저항하며 유럽 상인들의 활동도 제한했어요.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모로코를 가만히 두지 않았어요. 계속 침공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1880년 7월 모로코는 유럽 열강과 미국 등 12국들과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하게 돼요. 이 협정에서 모로코는 독립과 영토는 지켰지만 외국인에게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며 형식상의 주권만 인정받게 됐습니다.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특권 인정

그런데 이렇게 여러 열강에 개방됐던 모로코에서 점차 프랑스의 영향력이 우세해졌어요. 그런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어요.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단(西端) 케이프베르데로부터 동단에 가까운 지부티까지 철도를 세우려고 하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추진했는데, 이 정책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과 이집트의 카이로를 철도로 연결하려던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충돌했어요.

결국 1898년 오늘날의 수단 남부인 파쇼다에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양보로 두 국가는 긴장 관계가 풀어졌고, 1904년 4월 평화협정까지 체결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됐어요. 그리고 여기에서 영국은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해 주게 됩니다.

평화협정이 가능했던 것은 두 국가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았기 때문이에요. 당시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독일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어요. 그러나 프랑스가 떠오르는 신흥 강자 독일에 대항하려면 동맹을 맺을 상대가 필요했죠. 프랑스와 유일하게 가까운 관계였던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했어요.

영국 또한 미국·독일과 같은 국가들이 크게 성장하면서 예전처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특히 유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독일을 견제할 새로운 동맹이 필요했죠. 이런 상황에서 두 국가의 평화협정이 이뤄진 거예요. 영국의 대(對)모로코 무역량이 프랑스보다 많았지만, 영국은 이집트에서의 특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특권을 인정했어요.

모로코 보호통치 선언한 프랑스

이에 제일 당황한 나라는 독일이었어요. 그리하여 1905년 3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모로코의 항구 탕지에르를 방문해 모로코의 독립을 옹호하는 연설을 합니다.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세력을 견제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결속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죠.

독일 황제의 연설 이후 프랑스에서는 독일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타올랐어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906년 1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서 회의가 열렸어요. 독일의 예상과 달리 13개 참가국 가운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 독일 편에 섰어요. 외교적으로 고립된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제1차 모로코 위기라고도 불러요.

그런데 5년 후 제2차 모로코 위기가 발생했어요. 1911년 7월 독일 군함 판터호가 모로코의 아가디르에 입항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어요. 모로코에서 내란이 끊임없이 일어나자 프랑스가 이를 진정시키겠다고 군대를 보냈는데, 이에 독일이 '독일 상인 보호'를 구실로 군함을 파견한 거예요.

프랑스도 위기감을 느꼈지만 더 당황한 나라는 영국이었어요. 당시 독일은 영국의 해군력을 뛰어넘고자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고, 영국은 독일 군함의 모로코 입항이 대서양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갈등 끝에 이 위기 또한 협상으로 마무리됐어요. 여기서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지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콩고를 할양(자기 나라 영토의 일부를 다른 나라에 넘겨줌)받았습니다. 적수가 없어진 프랑스는 1912년 3월 모로코 보호통치를 선언했어요.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로코에서는 독립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고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반(反)프랑스 행동을 이어갔어요. 결국 1956년 3월, 44년 만에 프랑스 보호령이 종료되며 독립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제2차 모로코 위기 이후인 1912년 3월 모로코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의 모습. /위키피디아
제2차 모로코 위기 이후인 1912년 3월 모로코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의 모습. /위키피디아
모로코 국기. /위키피디아
모로코 국기. /위키피디아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