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대형 벽화 계약 포기한 화가와 화가 된 광부들 실화

입력 : 2022.12.12 03:30

미술 작품 이야기 다룬 연극

①연극 ‘레드’는 추상미술의 거장이라는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의‘시그램 벽화 사건’을 다루고 있어요. 사진은 로스코와 그의 조수로 설정된 가상 인물 켄이 함께 벽화 작업을 하는 모습. ②젊은 예술가(아티스트) 켄과 대가 반열에 있는 로스코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관객은 단순히 로스코의 작품 세계를 넘어 신구(新舊) 세대의 조화와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요. ③연극 ‘광부화가들’은 영국 뉴캐슬 탄광 지대를 배경으로 평생 좁고 어두운 갱도에서 살아온 광부들이 화가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④그림을 보고 토론하는 광부들 모습. /신시컴퍼니·프로스랩
①연극 ‘레드’는 추상미술의 거장이라는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의‘시그램 벽화 사건’을 다루고 있어요. 사진은 로스코와 그의 조수로 설정된 가상 인물 켄이 함께 벽화 작업을 하는 모습. ②젊은 예술가(아티스트) 켄과 대가 반열에 있는 로스코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관객은 단순히 로스코의 작품 세계를 넘어 신구(新舊) 세대의 조화와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요. ③연극 ‘광부화가들’은 영국 뉴캐슬 탄광 지대를 배경으로 평생 좁고 어두운 갱도에서 살아온 광부들이 화가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④그림을 보고 토론하는 광부들 모습. /신시컴퍼니·프로스랩
추상표현주의(추상 회화 일종)의 거장으로 불리는 러시아 출생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는 1958년 작품 의뢰를 받게 됩니다. 바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가 뉴욕 맨해튼에 건축한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을 장식할 벽화였는데요. 시그램 빌딩은 건물 외관 전체를 유리로 덮은 '커튼월' 방식의 직사각형 건물로, 단순한 형태와 치밀한 비례로 인해 미술 작품의 집대성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로스코의 그림은 건물 1층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스의 유리벽에 걸릴 예정이었어요. 이에 그는 벽에 이어붙일 총 40여 점의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1959년 레스토랑을 방문해 이미 지불받은 3만5000달러의 계약금까지 돌려주며 계약을 돌연 파기하겠다고 선언하는데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사건이 바로 '시그램 벽화 사건'입니다. 시그램 벽화 사건의 전후 상황을 재구성한 연극 '레드'가 오는 20일부터 내년 2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됩니다. 이처럼 미술 작품에 숨은 이야기를 무대 안으로 들여온 흥미로운 연극 작품들이 있는데요. 영국 뉴캐슬 탄광 지대의 평범한 광부들이 미술 동인(同人·어떤 일에 뜻을 같이해 모인 사람)으로 탄생하는 이야기를 그린 연극 '광부화가들'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난 1일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내년 1월 2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될 예정인데요. 연극 '레드'와 함께 '광부화가들'에 대해 알아볼게요.

신구 세대의 조화와 소통의 의미 담아

연극 '레드'에는 화가인 로스코와 그의 조수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 켄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인데, 예술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예술가(아티스트) 켄과 이미 대가의 위치에 있었던 로스코가 함께 시그램 벽화 작업을 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관객은 단순히 로스코의 작품 세계를 넘어 신구(新舊) 세대의 조화와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요.

1940년대 말 로스코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는 미술계의 흐름을 뒤바꿔놓는 혁신이었어요. 로스코 이전의 미술 사조(한 시대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였던 초현실주의와 큐비즘(대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하고 재구성해 표현)의 세계는 저물고 추상미술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어요. 구체적인 정물이나 인물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대신 점·선·면과 색채 자체에 집중하는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추상은 미술계를 압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로스코의 시대도 저물어 갑니다. 1950년대 후반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은 앤디 워홀(1928~1987)이 이끄는 팝아트로 넘어가게 되지요. 하지만 로스코는 이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팝아트에 열광하는 대중을 경멸해요.

시그램 벽화 계약 파기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어요. 이런 비싼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생각한 로스코는 그들이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거예요. 켄은 이런 로스코의 생각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에요. 결국 로스코는 켄에게 자신의 화실을 나가 켄이 구상하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보라고 이야기하며 극은 결말을 맺어요. 시그램 벽화로 장식될 예정이었던 로스코의 그림 중 9점은 현재 테이트 미술관이 기증을 받아 로스코 방에 전시돼 있습니다. 로스코는 작품 값이 비싼 작가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201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된 '주황, 빨강, 노랑(Orange, Red, Yellow)'은 약 1000억원 가치로 평가되고 있죠.

화가 로스코의 삶과 작품의 일면을 지적인 대화로 그려낸 연극 '레드'는 2009년 영국 돈마웨어하우스에서 초연된 이후 2010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15주간 공연을 이어나갈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어요. 영화 '글래디에이터' '에비에이터'로도 유명한 작가 존 로건의 탄탄한 대본과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대니시 걸'의 배우 에디 레드메인의 인상적인 켄 역할 연기로 토니상 작품상을 비롯해 6개 부문을 휩쓰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요. 한국에서도 이번이 여섯 번째로 공연되는 작품이랍니다.

화가로 거듭나는 광부의 모습 그려

연극 '광부화가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작가 리 홀의 작품입니다. 실제 탄광촌 출신인 리 홀의 작품들은 영국 북부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부들의 삶을 그려낸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1980년대 광부 대파업 시기를 배경으로 발레리노의 꿈을 찾는 소년 빌리의 여정을 담은 '빌리 엘리어트'와 달리, 연극 '광부화가들'은 1930년대 영국 동북부 뉴캐슬 탄광 지대 애싱턴을 배경으로 평생 좁고 어두운 갱도 안에서 살아온 광부들이 화가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미술 동인 '애싱턴 그룹(Ashington Group)'이라 불렸던 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썼지요.

2007년 영국 뉴캐슬 라이브 시어터에서 초연된 연극 '광부화가들'은 이브닝 스탠더드 어워드 최고연극상 등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지요. 한국에서는 이번이 세 번째 무대인데, 2010년에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돼 제3회 대한민국 연극상을 받았어요.

이야기는 평범한 광부들이 모이는 매주 화요일 미술 감상 수업에서부터 시작돼요. 강사 라이언은 이들에게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를 보여주며 미술사를 설명하지만, 광부들은 "이 그림이 무슨 의미인가요"만을 질문해요. 마치 모두가 당연하게 알아야 하는 교양처럼 여겨지는 그림들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광부들에게 예술이란 학습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죠.

라이언은 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볼 것을 제안해요. 광부들이 매주 수업마다 완성해서 가져온 그림들은 정규 미술 교육에서는 배울 수 없는 노동의 현장과 생활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죠.

이들은 낮에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애싱턴 그룹'이라는 미술 동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이들은 실제로 1934년부터 1984년까지 50년간 활동을 이어 나가요. 광부들의 그림이 연극 무대에서 슬라이드로 보일 때마다 객석에서는 "와" 하고 탄성이 터지지요. 이들의 그림은 지금도 애싱턴 우드혼 탄광 박물관에서 영구 전시되고 있답니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