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자유 만세" "독재 종식" 외쳤지만… 무력 진압으로 무산
입력 : 2022.12.07 03:30
중국의 민주화 운동
- ▲ 2011년 2월 중국 베이징의 한 거리에 모여 있는 재스민 시위대의 모습.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서 영향을 받은 민주화 시위예요. /위키피디아
이번 시위 때 중국 시민들은 곳곳에서 백지(白紙)를 들며 항의했어요. 그래서 이번 시위를 '백지 시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백지는 중국 정부의 검열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뜻해요. 이는 2020년 홍콩에서 일어난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에서 영향을 받은 거예요. 당시 당국이 정치적 구호를 외치지 못하게 하자 홍콩 시민들은 경찰이 처벌의 법적 근거를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침묵하며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를 들었지요.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이 확정될 즈음에는 중국 인민대 인근 도로 위에 "봉쇄가 아닌 자유를 원한다" "노예가 아니라 공민(시민)이 되자"와 같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리고, 이와 동시에 인터넷에서 '수업 거부' '시진핑 퇴진'을 주장하는 글이 유포되기도 했는데요. 이와 유사한 메시지의 구호가 공공 화장실에서도 계속 발견됐어요.
코로나 봉쇄에 항의하는 시위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분노로 번질 조짐을 우려했는지 중국 당국은 주요 도시의 봉쇄 조치를 완화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소셜미디어와 휴대전화 등을 추적해 시위 참가자를 찾아내고 있지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시위와 함께 중국이 어떻게 시위를 통제하는지 알아볼게요.
전 총리 사망 계기로 일어나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이번 시위를 두고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중국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라고 보도했어요. 톈안먼 사태는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2차례 일어난 중국의 민주화 시위입니다.
첫 번째 톈안먼 사태는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사망을 계기로 1976년 4월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를 추도하기 위해 톈안먼 광장에 군중이 모였는데요. 화환을 놓던 '인민 영웅 기념비' 옆에 문화대혁명(1966~1976년 진행된 극좌 사회주의 운동)과 중국의 초대 주석인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표어가 붙기 시작해요.
그러자 중국 정부는 기념비에 바쳐진 화환을 모두 치웠어요.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자동차에 불을 붙이는 등의 폭력 시위를 전개합니다. 공산당은 이들을 반(反)혁명 세력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용해 철저하게 탄압해요. 그러면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됩니다. 이후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민주화 요구의 열기가 올라가는데요. 이때를 '베이징의 봄'이라고 불러요. 이 시기에 사람들은 베이징 거리의 벽에 공산 정권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는데, 이 벽을 민주벽[民主 ]이라 불렀죠. 이는 1980년대 중국 공산당 내에서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과 같은 온건파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됐어요.
약 100만명 시민 광장에 모여
1989년 일어난 두 번째 톈안먼 사태는 같은 해 4월 15일 중국 공산당 전 총서기 후야오방의 사망이 발단이 됐습니다. 후야오방은 중국 개혁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물로 공산당 간부이지만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했는데요.
1980년대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인들은 외국의 생활 수준과 자유로운 사상을 접하게 됐고, 그러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어요.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진행될 때 수만명의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 모였는데요. 정치·사회·경제 측면에서의 개혁을 추구하는 시민들도 가세했어요. 그를 추모하는 시위대의 물결은 전국적으로 확대됐어요.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약 100만명의 시민이 톈안먼 광장에 모였다고 해요.
같은 해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들로 이뤄진 반정부 시위대를 중국 인민해방군이 장갑차를 끌고 와 폭력적으로 진압했어요. 당시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희생자가 수천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돼요. 이 모습은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 방중(訪中) 일정을 보도하기 위해 베이징에 머무르던 외신 기자들에 의해 해외로 널리 방송됐어요. 중국은 국제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었죠.
튀니지 재스민 혁명에 영향받아
2011년 2월에는 중국에서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영향을 받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어요. 20년 넘게 장기 집권 중이던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밀려 2011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습니다. 튀니지의 국화(國花)가 재스민이어서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튀니지의 독재 정권 타도 소식이 아랍과 아프리카 각지로 퍼지면서 이집트·시리아 등 주변 국가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요. 그러면서 중국에서도 재스민 혁명이 알려지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산당 일당 독재 타도를 위한 공개 집회 개최를 촉구하는 글이 확산됐어요. 이때 베이징·광저우·항저우 등 10개가 넘는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나지요.
이 시위는 1989년의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에서 22년 만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었어요. 시위에서는 "일당 독재를 종식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요구한다" "자유 만세, 민주 만세"와 같은 목소리가 나왔어요.
그러자 중국 정부는 인터넷에서 '재스민' '혁명' 등의 단어를 검열해 검색되지 않도록 차단했어요. 또 시위대가 들던 재스민 꽃을 꽃 가게에서 팔지 못하게 했어요. 경찰은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체포했고, 결국 각 지역에서 소규모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나는 선에서 마무리됩니다. 이후 2차 재스민 혁명도 계획됐으나 경찰의 대대적인 주동자 체포로 무산됐지요.
중국 정부의 민주화 운동 탄압
이런 시위가 있을 때마다 중국 정부는 "반체제 인사들의 시위 활동에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쳐요. 실제 이번 백지 시위에 대해서도 중국 관영 매체들은 "외세가 개입한 선동"으로 규정하며 비판에 나섰어요. 시위대가 중국 인민이 아니라 외부 세력이라고 규정하면 강도 높은 대응이 가능하다는 걸 노린 거지요.
중국 정부는 그간 "중국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 성장이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고 정치적 자유화보다는 경제 성장이 우선"이라고 중국 시민들을 설득해 왔어요.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던 반정부 인사들은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도 구속해 탄압했어요. 대표적으로 베이징의 봄 시기 활동했던 중국의 인권운동가 웨이징성은 중국 정부를 비판했다가 여러 번 중국 공안에 의해 구금당하고 결국 국외로 추방됐어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인플레이션(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계속 올라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현상)을 통제하고 복지 제도를 확충하면서 중국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 ▲ 지난달 30일 우리나라 홍대 거리에서도 중국인과 한국인이 모여 중국 정부의 방역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어요. /연합뉴스
- ▲ 지난달 27일 중국 공안(경찰)이 상하이의 한 거리에서 열린 중국 방역 정책 비판 시위 참가자를 제압하는 모습.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