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붉은 군대 승전비 없애고, 소련 장군 동상 철거했죠

입력 : 2022.12.01 03:30

역사 잔재 청산
美 시민들 "아메리카 원주민 탄압"
곳곳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 파괴
노예제 옹호 인물 동상 철거 움직임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있던 옛 소련의 군대 ‘붉은 군대’[赤軍]의 승리를 상징하는 방첨탑. 지난 8월 철거됐어요. /위키피디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있던 옛 소련의 군대 ‘붉은 군대’[赤軍]의 승리를 상징하는 방첨탑. 지난 8월 철거됐어요.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9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어요.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이후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옛 소련과 관련된 기념물 철거에 나섰는데요. 라트비아는 지난 8월 수도 리가에 있던 옛 소련의 군대 '붉은 군대'[赤軍]의 승리를 상징하는 방첨탑(方尖塔·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기념비)을 철거했어요. 같은 달 에스토니아도 러시아와의 국경에 있는 도시인 나르바에 전시됐던 옛 소련의 전승 기념물 탱크를 철거했고요.

세계 곳곳에서는 이처럼 냉전이나 제국주의 시대 등과 얽힌 과거를 지우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정부뿐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흔적 지우기를 요구하기도 하지요. 라트비아·소련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이와 유사한 세계 사례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볼게요.

소련에서 벗어나려는 발트 3국

라트비아는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와 함께 '발트 3국' 중 하나예요. 한때 소련에 속해 있던 발트 3국은 1991년 9월 소련 해체 직전 독립했지요. 그중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요. 철거된 방첨탑은 붉은 군대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을 물리친 기념으로 1985년 세운 건데요. 탑 꼭대기에 소련을 상징하는 별 3개가 달려 있지요.

1·2차 세계대전 중 라트비아는 소련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는데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전후 처리를 논하기 위해 열린 얄타회담에서 라트비아를 포함한 발트 3국을 소련으로 편입하는 것이 결정됐어요. 국민 뜻과는 상관없이 소련 일부가 된 거예요.

1985년 소련에서 개혁·개방 정책(페레스트로이카)이 발표된 이후, 1988년 라트비아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돼 독립 요구가 시작됐어요. 그리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소련 해체 직전인 1991년 발트 3국 독립을 승인하면서 라트비아는 독립하게 됩니다.

라트비아를 포함한 발트 3국은 2004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할 정도로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아요. 나토는 러시아가 속해 있던 옛 소련 등에 대항해 미국·서유럽이 주축이 돼 만든 집단 방위 기구입니다.

"소련 기념물 230개 철거한다"

폴란드는 일찍부터 소련 지배 역사 청산에 나선 국가예요. 폴란드와 러시아는 오랫동안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되풀이했는데요. 1939년 9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 동부를 침공한 데 이어 서쪽에서도 폴란드를 침공했어요. 2차 대전이 시작된 거지요. 그러자 소련의 붉은 군대는 나치의 점령을 받고 있던 폴란드를 해방시켰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소련군은 폴란드 군인들을 박해했어요. 2차 대전 이후 폴란드는 약 40년 동안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죠. 이런 역사 때문에 폴란드는 러시아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국가 중 가장 먼저인 1990년대 말 나토에 가입했어요. 2004년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했고요.

2015년 폴란드 북부 페네즈노시(市)의 지방 정부가 소련의 폴란드 침공 76주년을 맞아 시내에 세워져 있던 소련 장군 체르냐홉스키의 기념비를 철거했어요. 체르냐홉스키는 2차 대전에서 큰 공을 세워 37세에 장군이 된 소련의 영웅이에요. 이에 러시아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폴란드는 2017년 탈(脫)공산화법 개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아예 "소련 기념물 230개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했어요. 폴란드의 소련 지배 시대 청산 정책은 아직도 폴란드와 러시아의 외교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예제 기억을 없애려는 미국

미국에서는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매년 10월 둘째 월요일을 국경일(콜럼버스 데이)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어요. 그런데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의회에서는 이 콜럼버스의 날을 2017년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바꾸면서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어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스페인의 탐험가인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이곳을 신대륙으로 명명한 인물인데요. LA 시의회는 과거 신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섰던 백인 탐험가보다 그들 때문에 고통받았던 원주민을 기억하자는 거예요. 이후 뉴욕 센트럴파크에 세워져 있던 콜럼버스의 동상이 훼손됐고, 뉴욕주 용커스에 있던 콜럼버스 흉상의 머리가 잘리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기도 했지요.

최근까지도 콜럼버스는 인종차별 저항 운동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어요. 2020년 6월에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콜럼버스 공원에 있는 콜럼버스 동상의 머리 부분이 파손된 채 발견된 사건이 일어났어요. 미국 내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거지요.

같은 해 미국 메릴랜드주 주의회는 "흑인은 미국 시민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판결을 내린 로저 태니 전 연방대법관의 145년 된 동상을 철거하기로 했어요. 그의 판결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당선과 노예 해방 선언을 촉발시켰죠.

이런 흐름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노예제를 지키고자 했던 남부 연합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 논란으로 이어지는데요. 동상뿐 아니라 거리 이름, 남부 연합기 등 남부 연합과 관련된 기념물을 없애려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요. 2020년 미국 최대 자동차경기연맹이 모든 행사에서 남부 연합기를 없애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지요. 미국 하원은 노예제를 옹호하고 남부 연합을 지지한 인물의 동상을 철거하는 내용의 법안을 2020년과 2021년 연이어 통과시켰지만, 상원에서 처리되지는 못했어요. 당분간 논란은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제국주의 역사 지우려는 영국·캐나다·호주

이런 흐름은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2020년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이를 계기로 영국에서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격렬해졌는데 시위대가 17세기 노예 무역상으로 악명 높았던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일이 있었어요.

캐나다에서는 인디언 문명화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문화 학살'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는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동상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요. 19세기 중반 그는 인디언 기숙학교 설립을 제안했는데, 이곳에서 인디언 아이들은 학대를 당하며 죽어갔어요. 결국 지난해 동상이 있던 샬럿 타운 시의회는 이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의했답니다.
미국 메릴랜드주에 세워져 있던 남부군 병사의 동상으로 2020년 6월 파괴된 채 발견됐어요. /위키피디아
미국 메릴랜드주에 세워져 있던 남부군 병사의 동상으로 2020년 6월 파괴된 채 발견됐어요. /위키피디아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의사당 앞에 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이 2020년 6월 시위대에 의해 밧줄에 걸려 끌어내려진 모습. 미국 내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의사당 앞에 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이 2020년 6월 시위대에 의해 밧줄에 걸려 끌어내려진 모습. 미국 내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