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왕실의 중요 행사… 글과 그림으로 꼼꼼히 기록했죠

입력 : 2022.11.30 03:30

외규장각 의궤

①1659년에 제작한 효종국장도감의궤에는 효종의 재궁(관)을 받들고 묘소로 향하는 행렬을 그린‘발인반차도’가 30면에 걸쳐 그려져 있어요. 6000명이 넘는 관원이 등장하지요. ②소를 본떠 만든 희준(犧尊)과 코끼리를 본떠 만든 상준(象尊)의 도설이 그려진 의궤. 희준(왼쪽 아래)과 상준(오른쪽 아래)은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아 두던 술항아리예요. ③1849년 6월부터 10월까지 거행된 헌종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헌종국장도감의궤. 왼쪽 사진인 어람용은 초록색 비단 표지에 가느다란 놋쇠 판과 국화무늬 장식을 박아 장식했어요. 반면 오른쪽 분상용은 붉은 베로 만든 표지에 쇠를 덧대 고정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①1659년에 제작한 효종국장도감의궤에는 효종의 재궁(관)을 받들고 묘소로 향하는 행렬을 그린‘발인반차도’가 30면에 걸쳐 그려져 있어요. 6000명이 넘는 관원이 등장하지요. ②소를 본떠 만든 희준(犧尊)과 코끼리를 본떠 만든 상준(象尊)의 도설이 그려진 의궤. 희준(왼쪽 아래)과 상준(오른쪽 아래)은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담아 두던 술항아리예요. ③1849년 6월부터 10월까지 거행된 헌종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헌종국장도감의궤. 왼쪽 사진인 어람용은 초록색 비단 표지에 가느다란 놋쇠 판과 국화무늬 장식을 박아 장식했어요. 반면 오른쪽 분상용은 붉은 베로 만든 표지에 쇠를 덧대 고정했어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을 내년 3월까지 열어요. 외규장각 의궤가 2011년 프랑스에서 국내로 돌아온 지 10년 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소개하는 전시인데요.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정조 임금이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의 일종이에요.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에 그 전체 과정을 담은 기록물을 말하지요. 외규장각 의궤가 어떤 것이고, 역사적으로 어떤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좀 더 알아볼까요.

왕을 위해 특별 제작한 어람용

외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에 자리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시설이에요.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한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와 왕실의 안전을 지켜주는 천혜의 요새로, 그곳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국가의 귀중한 책을 보관했어요.

외규장각 설치 이후 왕이 직접 쓴 글이나 사용한 물품, 왕실 관련 도서 1000여 권을 보관했지만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의궤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어요. 그 뒤 1975년 사학자인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외규장각 도서가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우리 정부와 여러 단체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2011년 6월 그 전체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거예요.

의궤는 왕의 결혼이나 세자 책봉, 장례 등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 모든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정리해서 책으로 엮은 기록물이에요. 한 번에 같은 내용으로 3부에서 많게는 9부를 제작했는데 그중 1건은 왕이 읽어보도록 특별하게 만들고, 나머지는 관련 업무를 맡은 관청이나 국가기록물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로 보내졌어요.

국왕에게 올리는 것을 어람용(御覽用),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한 것을 분상용(分上用)이라고 하는데요. 왕의 손길이 닿는 어람용 의궤는 국왕의 권위에 어울리는 품격과 국격을 상징하는 다양한 장식을 갖추어 정성스럽게 만들어졌어요. 은은하게 품위가 배어나는 비단 표지와 반짝반짝 빛나는 놋쇠 장식, 깨끗하고 윤기 나는 고급 종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쓴 글자, 섬세한 솜씨로 그려 넣은 그림까지.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들어서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는답니다.

이에 반해 분상용 의궤는 행사를 맡은 관청의 관원들이 나중에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참고용 도서예요. 국가의 중요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튼튼한 삼베로 표지를 만드는 등 일반적인 책보다는 격이 높았지만, 본문에는 일반 종이를 사용했고 화려한 장식은 생략했어요. 외규장각 의궤는 몇 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어람용이라 그 가치가 더 높답니다.

글과 그림으로 하나하나 상세하게

역사 기록물로서 조선시대 의궤가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내용의 상세함에 있어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끝난 뒤 실무를 담당했던 행정기관에서 생산했거나 다른 관청으로부터 받은 공문서를 한데 모아 엮었기 때문에 행사의 모든 과정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憲宗·1834~1849년)은 성인이 되고 나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무덤인 수릉(綏陵)을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왕릉을 옮기는 일은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연대기 자료인 '헌종실록'에는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한 과정이 3건밖에 기록돼 있지 않아요. 하지만 당시 만든 의궤는 9권이나 돼서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데요. 헌종은 신하들과 의견이 엇갈리자 며칠에 걸쳐 토론을 해 무덤 이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2차례나 현장 조사를 실시해 풍수상 명당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왕릉을 옮기는 데 참여한 사람의 명단이나 그때 사용한 비용, 상세한 내역까지 모두 남아 있어요.

의궤에는 조선시대의 다른 기록물에는 보기 어려운 많은 그림이 포함돼 있어요. 의궤에 수록된 그림은 크게 반차도(班次圖)와 도설(圖說)로 구분되는데요. 빨강이나 파랑·노랑·초록 등 천연색으로 채색돼 더 눈길을 끌어요.

도설은 특정한 행사 장면이나 건물 구조, 행사 때 사용한 그릇의 형태 등을 그린 거예요. 설명하려는 대상의 기본적인 형태뿐 아니라 비례감, 색감, 전반적인 분위기까지 글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지요.

국가 의례나 왕실 행사에서 왕과 왕비, 여러 관원과 군인이 줄지어 행차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때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과 깃발·가마 등의 순서를 그린 것이 반차도예요. 반차(班次)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질서 있게 늘어서는 것'이라는 뜻인데요. 보통 2건을 그려서 1건은 왕에게 올리고, 나머지 1건은 담당 관청에 두었다가 행차 연습 때 사용했어요. 그리고 행사가 모두 끝난 뒤 의궤를 제작할 때 별도로 뛰어난 화원(畫員·그림 그리는 일에 종사하던 사람)을 뽑아서 다시 정성스럽게 그리게 했어요. 영조가 정순왕후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반차도에는 1100여 명의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해요.

반차도와 도설은 그릇의 모양이나 인물의 동선처럼 문자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사항을 시각화해서 전달하고, 적절한 절차와 형식에 맞게 치러진 행사 장면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줌으로써 글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의궤 속 그림들은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바른 예법 실천하기 위한 결과물

조선시대 의궤는 국가 의례나 행사에서 모범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만들었어요. 조선시대 국가적인 의례와 절차를 규정한 책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라면, 의궤는 그 예법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경험을 모은 사례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위상을 정립하고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예법에 맞는 의례를 중시했어요. 예법으로 위엄을 갖춘 왕이 신하와 백성을 제대로 돌볼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것이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이루고자 한 바른 정치의 모습이에요. 각자가 역할에 맞는 예(禮)를 갖춤으로써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것. 조선이 의례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 모습이에요.

시대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도 저마다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 모습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었어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조선의 방식 중 하나가 바른 예법을 실천하는 것이었어요. 그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조선시대 의궤랍니다.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