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순박한 떠돌이 총각, 기막힌 계약서로 욕심쟁이 양반 꾀어내 아이 구해줬죠
입력 : 2022.11.24 03:30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옛날 옛적에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총각이 있었어요. 충청도에서 왔나 봐요. 그곳의 사투리를 쓰네요. 세상일에 관심 많았던 총각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들을 보고 들어 아는 것도 많았지요.
어느 날 총각이 한 마을을 지나다가 울고 있는 젊은 부부를 보았어요. 총각이 왜 울고 있는지를 묻자, 부부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들려주네요. 마을의 욕심 많은 양반이 있는데, 작년에 빌린 보리쌀 한 가마를 못 갚았다고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가서 머슴으로 삼았다는 거예요.
부부의 사연을 들은 총각은 대뜸 자신에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말라며 욕심 많은 양반집을 찾아갑니다. 그러고는 대문 앞에 서서 크게 소리를 쳤어요. "내 평생 이런 부잣집은 처음 보네유. 이런 집에서 일 한번 해 보면 소원이 없겠구먼유!" 집 안에 있던 양반이 그 소리를 듣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어요. "일손이야 넉넉하지만, 굳이 내 집에서 일하고 싶다면 받아주지. 그런데 우리 집 살림이 보기보다 넉넉지 않아서 돈은 많이 못 주네!" 그러자 총각은 놀랍게도 돈은 필요 없고, 그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듣자 하니 이 집에 여섯 살배기 머슴이 있다면서유? 저도 체면이 있지, 그런 조무래기하고 어떻게 일을 같이 하남유?" 욕심이 앞선 양반은 아이를 젊은 부부에게 돌려보냈어요. 아이가 돌아가자 총각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이 좋으니 자신과 계약을 맺고 그것을 문서에 남겨 조건을 번복할 수 없도록 하자'고 부자에게 제안해요. 계약서엔 이렇게 씁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아무개(6살 아이)는 집으로."
다음 날 아침이에요. 그런데 총각은 방안에서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아요. 양반이 왜 나오지 않느냐며 호통을 치자 총각은 옷을 입혀 주지 않아서 나갈 수가 없다고 말해요. 계약서에 '입혀 주고'라고 쓰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양반은 할 수 없이 옷을 입혀줘야 했어요. 먹을 때가 되어서는 총각에게 밥도 떠먹여 주어야 했어요. '먹여 주고'라고 쓴 계약서 조항 때문이었죠. '재워 주고'라는 조항 때문에 총각은 안방까지 따라가 양반의 팔을 붙잡고 머리를 기댑니다. 결국 참지 못한 양반은 계약서를 박박 찢고는 총각을 내쫓았어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다시 길을 떠나는 총각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보이네요.
이 책 속의 그림은 2022년 대한민국민화공모대전 최우수상을 받은 지현경 작가의 작품이에요. 한국적인 풍자와 해학을 담은 섬세한 그림이 아름답지요. 정의롭고 영리하면서도 순박한 떠돌이 청년은 단순하게 표현했고, 반면 욕심쟁이 영감은 과장되게 그림으로써 두 주인공의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해서 표현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