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여성 활동 금지된 사회서 재능 펼친 여성 작가 이야기
입력 : 2022.11.21 03:30
뮤지컬 '브론테'와 '실비아, 살다'
형제로 위장해 글 쓴 브론테 세 자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 명작 남겨
실비아 플래스는 사후 퓰리처상 받아
- ▲ 뮤지컬 ‘브론테’는 19세기 영국에서 태어난 브론테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네버엔딩 플레이
여성 문학가인 브론테 세 자매의 삶을 그린 뮤지컬 '브론테'가 지난 13일 대학로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세 자매가 살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여왕 통치하에 대영제국을 완성하고 그 어느 때보다 국가가 번영했던 시기이지만, 여성들 사회적 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던 때이기도 했어요. 뮤지컬 브론테와 함께 여성 문학가에 대해 다룬 공연은 어떤 게 있는지 살펴볼게요.
문학사에 이름 남긴 브론테 세 자매
극은 어느 날 세 자매 앞으로 도착한 알 수 없는 편지로 막을 열어요. 보내는 사람을 알 수 없는 편지는 샬럿에게 "오만하지 말라"는 경고를, 에밀리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확신을, 앤에게 "너만이 나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후 샬럿은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도 가장 강인한 의지로 글 쓰는 삶을 이어나가는데요. 동생들과 의기투합해서 여성의 신분을 감추고, '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로 위장해 시집을 출판해요. 이 시집은 단 두 부만 팔릴 정도로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세 자매는 실망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필명으로 각자 소설을 발표합니다. 이 소설이 바로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죠.
제인 에어는 19세기 영국의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당한 여성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한 제인 에어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폭풍의 언덕은 황량한 언덕에 있는 저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극적인 사랑과 복수를 그리고 있고, 아그네스 그레이는 가정교사를 하던 여성이 성숙해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을 출판하고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약했던 에밀리와 앤은 세상을 떠납니다. 극이 시작되며 도착했던 편지는 동생들을 차례로 먼저 떠나보낸 미래의 샬럿이 자신과 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보낸 것이었어요. 공연에는 이런 말이 나와요. "우리 글이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줄 거야." 문학은 여자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대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글을 썼던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작가를 꿈꾸는 많은 이에게 희망을 주고 있답니다.
죽고 나서 높은 평가 받은 실비아
여성 문학가의 삶을 그린 또 한 편의 뮤지컬이 있습니다. 막이 열리면, 한 소녀가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올라요. 무언가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의 소녀에게 옆자리의 할머니가 다가와 빨간 목도리를 둘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죄책감은 가지지 마."
지난 8월 28일 대학로에서 막을 내린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미국 여성 시인 실비아 플래스(1932~1963)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른한 살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불꽃처럼 의지를 사르며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남편이자 같은 시인인 테드 휴스(1930~1998)가 엮은 '실비아 플래스 시 전집'은 1982년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지요.
그녀는 평생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문화 속에서 순종적인 딸, 정숙한 아내라는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하면서도 시인으로서 창작을 향한 고뇌와 싸워야 했어요. 이런 심경을 담아낸 실비아의 자기 고백적 시들은 작가 사후(死後)에 높은 평가를 받게 돼요. 이런 고민 속에서 세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던 불행한 시인의 삶까지 알려져 지금까지도 실비아 플래스는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어요. 뮤지컬에 등장해 실비아를 위로하는 할머니는 미래에서 온 실비아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19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난 실비아는 여덟 살 때 이미 보스턴 지역 한 일간지에 시를 실을 정도로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어요. 그리고 매사추세츠에 있는 사립 여자 대학인 스미스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후, 미국 국무부 산하기관인 풀브라이트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하게 되죠.
이때 촉망받는 시인 테드 휴스와 만나 결혼을 하는데, 테드는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영국 왕실이 뛰어난 시인에게 내리는 칭호)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실비아는 미국으로 돌아와 스미스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며 1960년 첫 시집 '거대한 조각상'을 출간해요. 이후 테드와 사이에서 딸 프리다와 아들 니컬러스가 태어나는데요. 그녀는 테드와 별거 중 홀로 두 아이를 키우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 빅토리아 루커스라는 필명으로 '벨 자(The Bell Jar)'라는 작품을 출간하는데요. 이 작품은 그녀가 쓴 유일한 소설이면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대학생 에스더 그린우드가 젊은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의 폭력성과 억압 등을 담고 있지요. 이 외 실비아가 생전 쓴 시들은 사후에 '에어리얼' '호수를 건너며' '겨울 나무' 같은 제목의 시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고요.
실비아의 치열했던 삶과 죽은 뒤에야 인정받은 작품들을 토대로, 위로와 희망 속에서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팩션(Faction· 사실에 바탕을 두고 상상력을 더해 쓴 창작물) 형태로 구성한 이 뮤지컬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녀가 필명으로 사용했던 빅토리아라는 캐릭터는 공연 속에서 실비아가 좌절할 때마다 용기를 줘요. "계속 글을 써, 너에게는 힘이 있어"라고 말하면서요.
막이 열릴 때 소녀 실비아가 탔던 기차는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인생을 의미해요. 결국 실비아는 기차를 세운 뒤 기차에서 먼저 내리지만, 뮤지컬 마지막에는 노년의 실비아로 보이는 할머니가 다시 기차에 올라 빨간 목도리를 또 다른 소녀에게 건넵니다. 서로에게 목도리로 온기를 전하며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다고 실비아가 말하는 듯하지요.
- ▲ 이들은 1847년 각각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라는 소설을 출간하며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네버엔딩 플레이
- ▲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 실비아 플래스의 삶을 그려요. /공연제작소 작작
- ▲ 실비아는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 필명으로 ‘벨 자’라는 작품을 출간했어요. /공연제작소 작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