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전사자 기린다더니… 2차 대전 'A급 전범'도 포함했죠

입력 : 2022.11.09 03:30

야스쿠니 신사

①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전쟁 범죄인)들이 합사(合祀·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를 지냄)된 곳이에요. ②과거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의 모습. ③태평양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위키피디아
①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전쟁 범죄인)들이 합사(合祀·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를 지냄)된 곳이에요. ②과거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의 모습. ③태평양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위키피디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17일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貢物)을 보냈어요. 이날 시작되는 추계 예대제(제사)를 맞아 '자민당 총재 기시다 후미오' 이름으로 '마사카키(제단에 바치는 상록수의 일종)'라고 불리는 공물을 보낸 것입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전보장담당상과 아키바 겐야 부흥상은 신사를 직접 방문해 참배했대요.

참배(參拜)란 죽은 사람을 기리는 곳에서 추모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해요.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전쟁 범죄인)들이 합사(合祀·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를 지냄)된 곳이에요.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정부의 행동에 단호히 대응하거나 항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며 선을 긋고 있는데요.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곳인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알아볼게요.

숙청당한 혼에 제사 지내던 곳

신사란 본래 일본 고유 민족 신앙인 신도(神道)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을 의미해요. 고대 일본인들은 자연물에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숭배하는 신도 매우 다양하고 그 수도 굉장히 많았어요. 이렇듯 처음에 신도는 주로 자연물을 숭배하는 신앙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조(먼 윗대의 조상), 즉 사람을 신으로 여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신성하다고 여긴 지역에 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둘렀죠. 이것이 발전하여 신사가 됐습니다. 현재 일본에는 공식적인 집계로만 약 8만5000개 이상의 신사가 있다고 해요.

1869년 건립된 야스쿠니 신사의 원래 이름은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였어요. 여기에서 동경은 도쿄를 의미하고, 초혼은 '혼을 불러온다'는 의미예요. 신사가 만들어질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말기 시대였어요. 이 무렵 서구 열강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막부는 두 개의 세력으로 나뉘게 돼요. 막부를 옹호하는 개항파와 막부 타도를 외치는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양이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 거예요. 이들 사이의 대립은 유혈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였지요.

그러던 중인 1858년 개항파는 대대적인 반대파 숙청을 단행했어요. 이때 조슈번(에도 시대 큰 경제력을 갖췄던 지역)의 번사(통치자)였던 요시다 쇼인을 비롯해 8명이 처형당하고, 100여 명 양이파가 귀양길에 올랐어요. 이 사건 후 양이파 측은 희생자에 대한 명예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1862년 일왕은 조슈번의 요청을 받아들여 죽은 자들을 순국선열로 보아야 한다는 칙문(일왕이 내리는 문서)을 내리게 됩니다.

이에 막부는 어쩔 수 없이 연루자를 사면하고 사형당한 자들 명예를 회복시켜줬어요. 그 과정에서 최초의 초혼제(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가 실시됐고,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무너진 이후에는 이들을 숭배하는 동경초혼사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후 초혼이라는 개념은 일본 내에서 점차 퍼져 전국 각지에 48곳에 이르는 초혼사가 세워지게 되는데요. 그중 동경초혼사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초혼사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일왕 위해 죽은 전사자까지 확장

1879년 동경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어요. 야스쿠니(靖國)란 용어는 본래 고대 중국의 사서인 '춘추' 좌씨전에 나오는 말로, '나라를 안정시킨다' '나라를 지킨다'는 뜻인데요. 그러면서 야스쿠니 신사는 일왕을 위해 싸우다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를 "나라를 지켰다"며 신으로 섬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에도 막부 말기 내전뿐 아니라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에서 죽은 군인 모두를 신으로 숭배하게 됐어요. 문제는 이런 일본군 전사자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에 대항해 일어난 각국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사람이 많다는 점이에요.

일본은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가면서 야스쿠니 신사의 국가적인 성격을 강화했고, 국민을 결속시키는 구심점 역할로 활용했어요. 야스쿠니 신사 합사제에 일왕이 참석하면 전국에 라디오로 이 과정이 실황 중계되기도 했지요. 매년 1회 열리던 합사제는 중일전쟁 등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전사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며 1938년부터 두 차례로 늘어났어요. 지금도 매년 4월과 10월 두 번 제사를 지내고 있고요.

침략 전쟁 미화한다는 비판 나와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치를 받았어요.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전후 개혁을 추진하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발표했어요. 그러면서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는 국가적 성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지만 1951년 연합국이 일본과 맺은 평화조약인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연합군최고사령부 통치가 끝나면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신도와 신사에 대한 엄격한 통제 정책도 점차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개인 혹은 민간단체가 전사자 위령제나 장례를 행할 때, 국가공무원도 배석해 조의를 표할 수 있게 됐죠.

그런데 1978년 야스쿠니 신사가 'A급 전범'을 신사에 합사하며 문제가 커졌어요. A급 전범이란 2차 대전 이후 전승국이 패전국인 일본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침략 전쟁을 주도했던 죄로 유죄 판결을 내렸던 전쟁 범죄인을 가리켜요. 그중 14명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는데, 여기에는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당시 총리 도조 히데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합사를 찬성했던 사람들은 "'A급 전범'이라는 것은 전승국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것이고, 이들 또한 전쟁의 희생자였기 때문에 범죄인이 아닌 전몰자(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로 인정해 합사한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A급 전범 합사도 문제였지만, 이후 일본 총리들이 신사에 참배하며 국제적인 문제가 됐습니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가 총리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를 했어요. 주변 국가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헌법에 위배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대응했죠.

16년이 흐른 후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2013년에는 아베 전 총리가 임기 시작과 함께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일본과 주변 국가 간의 갈등은 계속됐습니다. 전범을 참배하는 행위는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미화하기까지 하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조선인과 대만인도 합사해]

야스쿠니 신사의 또 다른 문제는 이곳에 조선인과 대만인도 합사돼 있다는 거예요. 현재 246만이 넘는 신이 모셔져 있는데, 여기에는 약 2만1000명의 한국인과 약 2만7000명의 대만인도 있어요.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 조선인과 대만인도 일본인으로 전쟁에 나가 희생했기 때문에 이곳에 합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많은 유족들은 "원하지 않는 합사"라며 빼달라고 하는 중이에요.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종교적 행위에 간섭할 수 없다", 신사 측에서는 "이미 합사된 신들은 뺄 수가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거절하고 있습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